조선 수군 첫 '승전보' 울린 옥포해전과 22인의 공신
조선 수군 첫 '승전보' 울린 옥포해전과 22인의 공신
  • 거제신문
  • 승인 201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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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정체성과만나기④]이순신 그리고 승전의 터 거제도 - 임진란 당시 거제도

정부 무능에 의병 '들불'…거제출신 공신 22인 맹활약
칠천량 해전 패배로 원균 '지탄'…분석 통해 재조명 돼야

세계적 조선해양 도시, 관광의 도시 거제도.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거제도 역사를 재조명해 보는 것은 지역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냉정한 역사적 사실이 주는 배움과 교훈은 물론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와 감동, 거제인에 대한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 마련을 위해 이번 기획을 준비했다. 아울러 기획기사에서 의도치 않은 역사적 사실의 오류도 발생할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따라서 이번 기획이 거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다양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옥포·합포·적진포서 42척 격침

1592년 5월4일 새벽. 대형 전선인 판옥선 24척과 중형 전선 협선 15척, 소형 쾌속선 포작선 46척으로 구성된 전라 좌수영 수군이 여수항을 떠났다. 5월6일 오전 당포 앞바다에 도착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원균의 함대와 합류했다.

조선 수군은 낙동강 하구의 가덕도로 향하다 7일 정오 무렵 옥포만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군 함선 50여척을 발견하게 된다. 이순신은 함대의 항로를 바꿔 옥포 포구 안으로 진입, 일본군 선단을 공격했다.

선봉장 이운룡이 돌격을 감행하자 미처 전열을 갖추지 못했던 일본군은 해안선을 따라 탈출을 시도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적선의 퇴로를 봉쇄하고 총통과 화살을 퍼부으며 적의 선단을 해안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 일부는 포위망을 뚫고 해상으로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해안에 상륙해 산속으로 도망쳤다. 적선 26척이 격침된 이날 해전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 수군의 첫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조선수군은 5월9일까지 계속된 제1차 해전을 통해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총 42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거나 불사르는 전과를 거뒀다. 성웅으로 숭상 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무패전설의 서막이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지인 옥포대첩에서 주력함은 판옥선이었다. 당시 전투편성 기록을 보면 거북선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도 사천해전부터 거북선을 거느리고 크게 승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지인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의 큰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 전투였다. 사진은 지난달 열린 옥포대첩기념제전 제례봉향 모습.

남방지역 방위 거제, 전략적 요충지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영 관할이던 거제는 남방지역을 방위하는 최전방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당연히 적군의 파상공세가 예상되는 지역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시의 방비상황과 군정을 살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최전방인 거제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의 이 같은 무능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역민들의 자발적 의병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거제출신 선무원종공신 22인은 임진왜란 때 거제지역민들의 활약상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선무원조공신은 1등 공신에 정 신응수, 첨정 윤영상, 부정 반중경, 첨정 김희진, 판관 신덕룡 등 5명이다.

2등 공신은 수문장 윤승보, 정 여막동, 보인 김옥춘, 판관 반관해, 금군 옥계성, 부정 윤흥량, 첨정 조윤전, 부장 제인국, 금군 제억, 수문장 이언량, 수문장 반중인, 판관 김후석, 수문장 제진, 부정 유녹상 등 14명이다. 3등 공신에는 부장 제홍록, 수문장 윤개, 면천 원산 등 3명이 기록돼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선 위인들이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무명 장졸들이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해전에 참가해 공을 세웠으며 의병으로 활동했다. 결국 이들의 활동은 거제를 지키는 원동력이 됐고, 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순신 성웅으로…원균은 패장으로

이순신 장군이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동안 원균 장군은 역사의 패장으로 수모를 당해 왔다. 당시의 전투상황에 대해 영의정 유성룡은 "처음 왜병이 상륙했을 때 원균은 군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나가서 공격하지 못하고 그의 전선 100여척과 화포와 군기를 죄다 바닷속에 침몰시켜 버리고 홀로 달아나 수군 1만명이 무너지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 이조참판을 지낸 이선은 "원균이 거느린 군사의 수가 아주 적고, 그 세력이 심히 약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 이미 왜선을 불태워 깨뜨렸고, 이 공으로 승급했다. 이순신이 도착한 뒤에도 반드시 스스로 선봉이 돼 곧바로 적진에 돌입하여 적과 싸움에서 모두 승리했다"고 '원균전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초기 원균 장군의 군세는 어느 정도였을까. 난중일기에는 '임진년 초기 경상우수사가 원균의 전선보유 수는 25척'이라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난중일기의 기술이 사실이라면 원균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합동작전을 펼치기 전 왜적선 350여척과 싸워 18~19척의 전선을 잃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당포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과 합세할 당시 원균 장군이 6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기록됐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원균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힘을 합치기 전 20여척의 군선으로 왜적선을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특히 원균 장군이 후세의 지탄을 받는 이유는 칠천량 해전의 패전 때문이다.

당시 원균 장군과 행동을 같이 했던 선전관 김식은 "1597년 7월15일 밤 왜선 5~6척이 불시에 내습해 우리 전선 4척이 침몰되자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해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달 울 무렵에는 헤아릴 수 없는 왜선이 몰려와서 여러 섬에도 끝없이 깔렸습니다-<중략>-신은 통제사 원균 및 순천부사 우치적과 간신히 탈출해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 행보하지 못해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칠천량 해전의 1차적 책임은 원균 장군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따져본다면 모든 패전의 멍에를 원균 장군에게 돌리는 것도 무리가 있다.

도원수 권율과 조정에서 원균 장군의 계속적인 지원요청을 거부한데다, 권율은 육군의 지원없는 공격은 승산이 없다고 출전명령을 거부한 원균에게 곤장을 치면서까지 무모한 전투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에 비해 너무나 박한 평가를 받고 있는 원균 장군. 칠천량 해전의 정확한 패전 원인 분석을 통해 원균 장군에 대한 평가도 새롭게 이뤄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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