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포에 정착한 '이리사촌' 일본인들, 근대적 어업기술로 큰 이익 챙겨
경제권·신 문물로 거제 주민 유혹…술·도박 등 피폐·몰락의 길 재촉

1889년 한일통어장정 체결, 거제해역 일본인 수중으로…
1876년 부산포 개항 뒤 마산포, 진해 등지의 어항이 열리게 되자 진해만 인근의 거제와 고성 등지도 쉽게 개항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경남 지역 수산업의 이권도 자연스레 일본 어업자본가에게 넘어가는 수순을 밟게 된다.
특히 1889년 11월12일 한일통어장정이 체결되면서 거제 해역은 사실상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한일통어장정(또는 조일통어장정)은 조선해역의 어로권을 일본에게 정식 양여한 것으로, 조선경제침탈의 또 하나의 외교적 근거가 된 어업협정이다.
1876년 이후 장승포와 능포지역은 일본인의 어업기지로 알려지면서 계절마다 일본 대선단이 거제와 진해만 일대에서 대구와 멸치, 청어 등을 잡아갔다.
장승포 지역 일본어민들의 거주지는 촌장 '이리사'의 이름을 따 '이리사촌'이라고 불렸다. 1907년 당시 부산세관 다니모토가 조사한 이리사촌의 일본인 인구는 58가구 226명이었고, 조선인은 80가구 380명이었다.
이리사촌은 일본인들의 천국이자 자본가들이 탐내는 무궁무진한 어업자원과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발동선과 냉동선 등을 갖춘 근대적 어업기술로 조선인들을 종업원으로 채용해 큰 이익을 챙겼다.
당연히 거제사람들은 일본 어장주에 고용돼 값싼 임금을 받으며 노동력 착취를 당했고, 자주 동맹파업을 결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이주가 이어지면서 일본식 주택과 이리사우편취급소, 이리사심사소학교, 이리사수산조합시장, 콘피라 신사 등이 생겨났다.
또 총연장 220여m의 방파제가 축조됐고 수산물 판매소, 감독사무소, 수산물제조장 등이 건설됐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거제도 인구는 약 5만 여명이었고, 일본인은 250여 명 정도가 이리사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일본인 수가 560여 명으로 2배 가량 늘어나게 된다. 당시 이리사촌은 일본 어촌과 다름없는 거리로 번창했다고 한다.
일본인의 끊임없는 이주는 이리사촌을 고등어건착망어업의 발상지로 변모시켜, 남선 최대의 고등어 어업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최고 풍어기에 장승포 항에 들어오는 선박은 어선 500척, 기선 140척, 범선 150척 등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1930년은 이리사촌의 최대 전성기였다. 술과 여자, 도박이 성행하며 일본 본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흥청거렸다고 전해진다.
이리사촌의 융성은 거제인들의 피폐와 몰락이라는 반대급부로 나타났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착취정책의 기반 마련을 위해 행정력을 배경으로 관리와 상인, 어업인, 고리대금업자, 실업가들을 이주시켜 각처에 세력을 심었다. 이들은 어업으로 인한 경제권과 신 문물로 선량한 거제 주민을 유혹했다.
그 결과 거제인들은 일본인 어장에서 낮은 노임을 받으며 기아에 허덕이거나 일본인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고 전해진다.

개항 이후 어획고 매년 급격히 감소, 대구어장 결국 쇄락의 길로…
조선시대 거제지역 어장은 왕실에서 직접 경영해 운영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능포와 진해만 일대의 대구어장은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거제와 진해만 일대는 일본 어선으로 넘쳐나게 됐고, 어획고는 매년 급격히 감소했다. 특히 진해만 일대는 잦은 기선의 왕래와 군함 출입으로 바다 오염이 가속화돼 수산자원이 크게 줄었다.
조선에 이어 대한제국에서도 중요도를 인정한 능포 일대 대구어장은 1906년 의친왕궁에 부속되기에 이른다. 당시 친일내각과 통감부가 장악하고 있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정치·경제적 의도에 좌우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의친왕에게 넘어간 대구어장은 한 달도 되지 않아 일본인의 손아귀에 다시 넘어가게 된다. 1906년 이후 거제도와 가덕도에 이르는 대구어장은 이후 일본인에게 대부되면서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