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 포로수용소에선 무슨 일이…
여군 포로수용소에선 무슨 일이…
  • 거제신문 기획취재팀
  • 승인 201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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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정체성과 만나기⑥]이 보다 더한 아픔은 없다① - 포로수용소와 거제도

1950년 11월27일 유엔군 거제도에 포로수용소 설치 확정
"포로가 더 잘 먹고 잘 입는다" 한국군 경비병 불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11월, 포로가 무려 13만7천여명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 그 전쟁에는 반드시 파괴와 살육, 전쟁포로가 동반됐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발발한 한국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공격할 전쟁 초기, 이미 38선과 서울 북방전선에서는 많은 수의 한국 군인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된 상태였다.

이후 유엔군의 참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격파한 뒤 38선을 넘어 북진했고, 그때마다 수많은 북한군들이 유엔군의 포로가 됐다.

1950년 9월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한군은 보급로와 퇴로가 막혔고, 이와 궤를 같이해 북한군 포로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같은 해 11월, 포로의 수는 무려 13만 7,000여명에 달하게 됐다. 당연히 유엔군으로서는 이들의 관리문제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유엔군이 결정한 최선의 선택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육지와도 격리된 섬에 포로들을 옮기는 것이었다.

결국 1950년 11월27일 유엔군은 거제도에 포로수용소 설치를 확정한다. 당시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설치 장소로 정해진 것은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포로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된다는 점과 육지로부터의 이동거리가 짧다는 점 때문이었다.

포로수용소 설치 공사는 1951년 초부터 시작됐다. 당초 6만 명의 포로를 수용하도록 계획했지만, 이후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변경됐다.

대규모의 포로수용소를 건설하기 위해 포로 선발대들이 거제에 먼저 도착했다. 이들은 포로수용소가 들어설 장소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도로를 닦고 감시망을 세운 뒤 그 안에 수많은 천막을 쳤다.

또 3,000개의 침대를 가진 제64야전병원과 2,500개의 침상을 보유한 두 개의 별관, 그리고 부속건물이 설치됐다. 1,190만826m²(360만평)의 대지 위에 새 포로수용소가 만들어진 것이다.

고현지구는 신현읍 고현·장평·상동·문동·양정·수월 등 6개 리와 연초면 연사리 임전마을, 그리고 송정리 일부가 포로 공동묘지로 징발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됐다. 1개 수용소에는 약 6,000명을 수용했다.

1951년 6월 말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인원이 15만 명 이상이었으며, 통계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15만~17만 여명의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28개의 수용소에 배치됐다.

고현·상동·문동리에는 인민군 반공포로가, 수월리 해명에는 중공군 포로, 수월리 주작골에는 여성 포로, 양정·수월리 인민군 친공포로, 고현·수월리에는 남한출신 의용군이 수용됐다.

▲한국전쟁이 계속되면서 포로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거제도를 중심으로 당시 통영 일대 섬 지역에 수용소가 건설됐다. 사진은 추봉도 포로수용소 유적.

거제도포로수용소, 포로 인도적 대우…포로에 미 군수품 지급, 한국군 불만

포로들의 관리는 미군이 각 수용소장으로 임명돼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직접적인 관리는 자치제로 포로 간부들이 맡았다. 각 수용소마다 군대식으로 간부들이 여단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으로 임명돼 포로들을 관리했다. 수용소 철조망 밖 보초경비는 한국군이 담당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기 전 포로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굶주림과 추위에다 힘겨운 강제노동과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많은 포로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의 대우가 개선됐다. 미군 당국이 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인도적인 대우를 한 것이다.

피복과 식료품이 제대로 지급되면서 포로들은 쇠약해진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지급된 지급품들은 모두 미 군수품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군 경비병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포로들이 한국 군인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입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 철조망 밖 한국군 보초와 포로들 간 시비와 불상사가 벌어지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여군 포로수용소는 단 한 곳이었다. 북한군에서 주로 위생병을 했었던 그들은 대부분 수용소 간이병원에서 일을 했다.

특이한 사항은 여군수용소에 임산부와 갓난아이가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수용소 병원에서 일을 하는 여군 포로들은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남자 포로들과 한국군, 미군병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20대 젊은 나이에 이성을 그리는 것은 생리적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와 포로수용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또다른 아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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