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식간에 불어난 물이 마당을 채우며 아래채 부뚜막을 수위로 위협한다. 처음 당하는 일이다.
집 마당 텃밭에서 처마로 올린 호박과 수세미 넝쿨은 걸친 장대 째 날아가고 처마에 잇댄 슬레이트도 종잇장 같이 날아간다.
뉴스를 보던 TV도 전원이 나가고 들기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아예 나가버린다. 정전이다.
야차 같은 소리에 갈퀴 같이 휘젓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마당으로 뛰어들어 배수로를 쑤시며 물 빼기를 시도하고 아래채 축담으로 모래주머니를 쌓는다.
처마 깊은 곳이라 안심했던 강아지의 요람에까지 비바람이 들이쳐 채 눈도 뜨지 않은 강아지들을 화장실로 옮긴다. 이러고도 문 열기가 무서울 만큼의 광포한 비바람은 계속 몰아친다.
태풍 산바를 겪으며 낮이지만 어두운 한나절을 보낸 우리 집 사정이다. 비바람이 잦아들어 서너 시간 후, 태풍 산바가 지나간 뒷자리가 궁금해 차를 몰고 나섰다.
길에는 나뭇가지의 잔해들과 넘어지고 부서진 가로수들이 즐비하고 논에는 이삭을 달고 누워버린 벼들이 지천이다. 시내도 몇몇 곳이 범람하고 도로가 붕괴됐다는 라디오 뉴스다.
우리 인근에서는 인명피해가 없다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전국적으로 고속도로의 추돌 사고 몇 건과 경남 함양, 경북 성주에서 산사태로 인한 사망 실종이 각각 1명이라고 한다.
자료 통계로는 같은 5급의 대형태풍으로 1959년 9월 사라태풍에서 사망·실종 948명, 2003년 9월 매미태풍에서 사망·실종 135명인 것에 비하면 미미한 피해 숫자긴 하지만 태풍으로 인한 공포감과 우울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며 올려다본 서녘하늘은 바람흔적 하나 없이 맑게 개었다. 서러울 만큼 맑게 개어 되레 숨이 막힌다.
파랗게 투명한 하늘에 길게 꼬리 진 깃털 구름과 이 깃털 구름의 끝자락을 주황으로 물들이며 산자락으로 숨어드는 해와 이들을 투영하고 있는 바다까지 마치 꿈결 같다.
이 모두는 그 무서운 광포의 비바람이 언제 있었더냐는 듯 너무도 태연한 시침을 뗀다. 이 시침엔 그저 사람아, "아, 태풍 후의 하늘이라니...."할 뿐이다.
하늘은 그렇게 휘젓고 할퀴고 간 상처들을 이런 하늘로 어루만지고 감싸는가 보다. 그러면서 이 상처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 네 몫이라고 말하는 게다.
"꺾어지고 부서진 아픈 자리만 보지 말라고, 네 가진 품 만큼 서로 보듬고 있는 만큼 감싸며 나누라"라고 태풍이 지난 하늘, 바다 자리 저리도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