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프로 무대 데뷔하자마자 호주장사 등극, 씨름판 '신성'으로 우뚝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 모래판 떠나…지금은 후배 양성·씨름 부흥에 '온힘'
'골리앗' 김영현을 비롯해 황규연 신봉민 염원준…. 씨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들 이름은 한 번쯤 자신의 귓가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윤경호'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할 지도 모른다. 창단 1년 밖에 되지 않은 거제씨름연합회가 승승장구하며 차곡차곡 내실을 다져나갈 수 있었던 건 전무이사와 감독을 맡고 있는 윤경호(39) 장사가 있어서 가능했다.
윤 장사는 김영현, 황규연 등과 비슷한 시기에 씨름판을 누볐던 '명성 있는' 씨름 선수였다. 거제면 서정리가 고향인 윤 장사는 지금도 거제 유일의 '장사' 출신 선수로 남아있다.

◇ 혜성같이 나타난 '신성' 씨름판을 뒤흔들다
1996년은 혜성같이 나타난 신예의 등장으로 씨름판이 시끄러웠다. 경남대 4학년에 재학중이다 현대씨름단에 입단한 윤 장사는 그 해 8월31일 호주 시드니 달링하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호주장사씨름대회'에서 이변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씨름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단판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윤 장사는 16강전에서 '소년장사' 백승일과 8강전에서 김정필 등 내로라하는 우승후보들을 하나씩 꺾었고, 준결승전에서도 '무서운 신인' 황규연을 종료 5초전 잡채기로 제압하며 결승전에 올랐다. 기세를 이어간 윤 장사는 결승전에서도 당시 프로 3년생 배노일에 3-1로 역전승을 거두고 생애 첫 타이틀을 거머쥔 것.
당시 결승전에서 윤 장사는 배노일에 밀어치기를 허용하며 첫 판을 내줬지만, 이내 전광석화 같은 발뒤축걸이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셋째 판에서는 기습적인 허리치기로 상대를 제압한 뒤, 화려한 옆뒤집기로 네 번째 판마저 따내며 모래판의 '신성'으로 등극했다.
◇ 불의의 교통사고…눈물로 씨름판을 떠나다

순간적인 힘을 가하는 게 중요한 씨름에서 무릎 부상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것. 씨름판을 발칵 뒤집어놓을 것만 같았던 윤 장사는 이후 부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잊혀 갔다.
이후 1999년 5월 삼척장사 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에 등극하며 3년 간의 '부상 악몽'을 어느 정도 달래기는 했지만 부상의 여파는 계속 따라다녔다.
하지만 2년 뒤 씨름인생에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2001년 4월 5년간의 현대씨름단 선수 생활을 청산하고 신창 코뿔소씨름단으로 유니폼을 바꿔 입은 윤 장사는 그 해 10월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 지도 모를 영암장사대회에서 첫 지역장사에 등극했다.
이 대회에서 변칙에 능한 윤 장사는 팀 동료이자 라이벌인 황규연을 맞아 마지막 판까지 가는 접전 끝에 3-2로 누르고 황소트로피를 차지했다.
첫 판을 내준 윤 장사는 장기전으로 진행되던 두 번째 판에서 기습적인 오금당기기로 동점을 만든 뒤 끌어치기 공격으로 세 번째 판까지 따내며 2-1로 전세를 뒤집었다. 네 번째 판을 잡채기로 내준 윤 장사는 운명의 마지막 판에서 네 번째 판에서 당했던 잡채기로 되갚으며 정상 등극의 기쁨을 누렸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부상 악몽을 이겨내며 버텼던 윤 장사는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히는 부상 때문에 결국 이듬해 7년 만에 아쉽게도 모래판을 눈물로 떠나게 된다.

◇ 어린 후배들을 위해 남은 모든 것을 내놓다
2001년 영암장사대회 결승에서 맞붙었던 황규연은 지난 추석장사대회에서 백두장사에 등극하며 지금까지도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윤 장사도 부상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보다 많은 장사 타이틀에 등극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추석장사대회 결승에서도 황규연과 다시 한 번 맞붙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지나간 과거.
윤 장사는 "프로는 2∼3등이 없다. 특히 직업 선수들은 부상도 자기 관리의 일부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때문에 부상으로 일찍 선수생활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라며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제는 자신이 하지 못했던 부분을 어린 후배들이라도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씨름 꿈나무'를 육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윤 장사는 "여러 학교에 순회지도를 다녀봤는데 반응이 좋다. 붐이 일었을 때 씨름을 즐기고 활성화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씨름은 꼭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신체·정신적으로 좋은 운동"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현재 윤 장사는 거제초등학교에서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료 씨름교실을 열고 있다. 또 중앙초등학교에서도 토요스포츠 방과후 교실을 개최해 어린 후배들에게 다양한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윤 장사의 열성적인 가르침과 아이들의 배우려는 열의가 더해져 최근에는 문경어린이씨름왕선발대회에서 거제초 6학년 이건재 군이 성인 씨름의 천하장사 격인 통합장사 부문에서 3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윤 장사는 "사비를 털어 학생들 간식도 사주는 등 금전적인 출혈은 감수하면서도 후배들에게 우리 민속 씨름을 가르쳐 줄 수 있어 마냥 기쁘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건재 같은 가능성 있는 친구들이 제법 많기 때문에 유소년 씨름 선수를 육성할 수 있는 기반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씨름은 샅바를 이용해 안전하며, 유도의 다리 기술과 레슬링의 태클 기술 등 다른 종목의 기술들이 통용되는 과학적인 스포츠"라며 "중심이 좋은 운동이기 때문에 다른 종목 선수들도 은퇴 후 생활체육에서는 씨름 선수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대중성도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윤 장사도 거제씨름연합회 하대인 회장과 마찬가지로 거제에만 유일하게 학교 씨름부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윤 장사는 "거제초의 경우 훌륭한 인재들이 많기 때문에 씨름부를 육성할 수 있는 기반은 조성돼 있는 셈"이라며 "거제초가 최근 도교육청에 3000만원 상당의 씨름 전용매트를 신청해 놓은 상태여서 조만간 지원이 결정되면 씨름부 창단도 급물살을 탈 것"이라고 내다봤다.
IMF 이후 쇠퇴의 길을 걸어 프로 씨름이 와해되고 대학 22개팀과 실업 23개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씨름. 윤 장사는 씨름이 다시 우리나라 최고 인기 스포츠로 일어설 것을 확신하며, 대한민국의 남단 거제에서 씨름 부흥의 밀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꿈은 부상으로 일찍 접을 수 밖에 없었지만 어린 후배들이 자신의 꿈을 대신 실현시켜 주길 바라는 '39살 노총각'의 선한 눈매에는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금빛 모래판이 아로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