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거제는 호호막막한 섬으로 죄인이 귀양살이 하던 섬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개국의 하나였던 두로국(瀆盧國)이 있었고 신라경덕왕 때 거제군이 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삶의 문화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
고현 서문에서 공설운동장 뒤쪽을 돌아 거제 열 마지기 골로 넘어가는 옛길이 있다. 이 길을 김현령 고개라 한다. 이 길은 현재는 등산길로 이용되고 있다. 이 길 밑은 계룡산 북단으로 산록이 펑퍼짐하고, 소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우거져 있다.
그 중간으로 국도가 개설돼 그 아랫쪽은 삼성조선소가 자리잡고 있다. 삼성조선이 들어서기 전에는 이 일대가 진들로 들이 길고 넓어 비옥한 땅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을 진들, 긴들이라 해 장평(長坪)이라 한다.
이 지역은 고현만 바다가 접해있기 때문에 어촌의 일부로 일찍이 인류가 정착해 살아온 부촌마을이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비행장이 설치됐던 곳이다.
1975년께 장평 위쪽으로 국도가 나기 전에는 바닷가를 따라 사곡 뒤쪽으로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조선 중기에 현령 김대기(金大器)가 계룡산 북단 중턱으로 고현∼거제로 통하는 길을 냈다. 이 길이 나고 부터는 사기장골이 교통이 편리했다.
사기장골은 바다와 1km쯤 떨어져 있는 산촌이었다. 장평리 산 62번지와 산 83-12번지 일대다. 이 일대에 사기그릇을 굽던 도요지(陶窯地)가 있었다.
사기장골은 계룡산 북단의 펑퍼짐한 산록에 30여 호의 집이 있었고 소나무 굴참나무 등으로 잡목 숲이 울창했다. 사기장골 맞은편 점등산 일대에 사기를 굽던 도요지가 있었다. 도요지는 오랜 세월 잡초와 흙에 묻혀 정확한 형태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가마터는 양호했다.
도요지에서 발견되는 자기편(磁器片)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자기편은 조선시대 분청백자로 추정되는 종지와 사발 등 여러 형태의 편린(片鱗)이다. 사기를 굽던 곳이라 해 그곳에 있던 마을을 사기장골이라 했다. 현재는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이곳에 사기를 굽던 도요지(陶窯地)가 있었다는 것은 지형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기를 굽는데는 첫째가 땔감이다. 이 지역은 계룡산 북단 산록으로 잡목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사기의 원료인 흙이다. 장평 앞 바닷가에서 나는 진흙(지독)은 찰지고 질이 좋아서 사기그릇을 만드는 원료로 좋았다.
그런 조건 때문에 장평에 사기를 굽는 도요지가 생기게 됐다. 또 주변에서 발견되는 토기 편린 등을 보면 일찍이 토기를 굽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곳에서 제조된 그릇은 대부분 거제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