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전래풍습에 섣달 그믐날 궁중에서 대포소리로 악귀를 쫓는 '연종포(年終砲)'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정초에 보신각종을 쳤다는 기록은 없다. 조선시대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밤 10시에 성문을 닫으면서 28번 치는 인정(人定)과 새벽 4시 통행을 알리기 위해 치는 33번의 파루(罷漏)가 있었을 뿐이다.
이때 33번은 불교의 도리천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불교가 성행하지 못했던 조선사회에서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을 리 만무하고, 다만 33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은 매우 컸다.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 때 그 대표를 33인으로 했고, 지금도 회사나 단체의 발기인을 33명을 하는 것이 관례이듯 사발통문을 돌릴 때도 33명의 대표가 서명했다.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명도 같은 의미 때문이다.
'제야의 종(除夜の鐘 : じょやのかね)'은 우리 문화와는 상관없는 양력설을 먼저 도입한 일본의 세시풍습이다. 우리는 제야라는 말보다 제석(除夕)이라고 했다.
첫 타종은 1929년 1월 1일 경성방송국이 남산 기슭에 있던 일본 절 본원사의 범종을 방송국 스튜디오로 옮겨와 직접 친 것이 그 효시다. 같은 해 12월 3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1930년 정초에는 아사쿠사 관음당에서 중계 받아 제석의 종을 중계방송'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초기용어는 '제석의 종'이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문화 말살을 기도하며 일본처럼 양력설을 쇠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행사라고 보아진다. 1954년 정초부터 다시 시작된 '제야의 종소리'는 연원이야 어떻게 됐던 이제는 현대식 세시풍속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 종소리는 '제야의 종소리'라기보다는 '새해의 종소리'라고 해야 옳다. 정확하게 새해 첫 시간에 타종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