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둔덕면 거림리 우두봉 아래 둘레 550m 높이 5m의 산성이 있다. 이 성을 폐왕성(廢王城) 또는 피왕성(避王城)이라 했다.
본래의 이름은 둔덕 기성(岐城)인데 폐왕성이나 피왕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18대 의종왕이 무신(武臣) 정중부의 발란으로 둔덕으로 피신을 와서 3년간 살다 갔기 때문에 왕이 폐위(廢位)돼 살았던 곳이라 하여 폐왕성이라 했으며 또 왕이 피신을 와서 살았던 곳이라 하여 피왕성(避王城)이라 불렀다.
둔덕 기성이라 한 것은 둔덕의 우두봉 아래 산마루에 축성된 성이라 하여 산마루기(岐) 성곽성(城郭城) 기성(岐城)이라 했다. 983년에는 기성의 이름을 따서 둔덕면 거림리에 기성현(岐城縣)이 설치됐다. 성곽 기초조사와 성벽일부 복원에서 이 성의 축성법과 축성연대가 확인됐다. 이 성의 최초 축조된 연대는 7세기경 신라시대로 확인됐다.
신라 문무왕 때 거제에 설치됐던 상군(裳郡)과 신라 경덕왕 때의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기단과 성벽의 축성은 신라시대 축조 방법이고 현문(懸門)등 일부는 고려시대 수축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일부 성벽상부와 현문지(懸門址) 등은 조선시대 보수 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 까지 거제의 읍성(邑城)역할과 방어진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이다. 이 성은 거제의 관문인 견내량을 관망하는 방어성지로 축성됐다. 그후 사등성과 오량성이 둔덕기성의 보조 방어성으로 축성됐다. 산 정상에 거대한 성을 쌓기 위해서 성돌을 구해 와야 하는데 그 많은 돌을 어디서 가져왔으며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런 성을 쌓았는지 궁금증을 갖게 한다.
전해 져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성을 축성 할 때 하늘에서 마고(麻姑) 할매가 내려와 사등면 가조도 앞에 있는 광이도(廣耳島)의 돌을 치마폭에 담아 와서 하룻밤에 이 성을 다 쌓고 나니 닭이 울어서, 마고 할매는 치마폭에 담고 있던 돌을 성아래 부어 놓고 하늘 나라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때 버린 돌이 성 아래 골짜기에 돌 너더렁을 이루고 있다. 그 당시 사람의 힘으로서는 산 정상에 성을 쌓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곳에 신라 때 성을 쌓게 된 것은 이 지역이 중요한 방어진지가 되기 때문이다. 신라의 성벽은 성 상단에 망을 보면서, 활을 쏴던 여장(女裝)이 없었는데 이 성에는 여장이(女裝) 설치돼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장(女裝)은 조선시대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술조사 내용을 보면 1996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거림리 유적지 발굴조사, 1999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둔덕 기성(屯德 岐城=廢王城) 정밀지표조사, 2001년 거제시청에서 남동쪽 성벽복원(56.5m), 2004년 동아문화재연구원에서 동문지 및 동쪽 성벽 시굴조사, 2007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집수지(集水池·연못) 발굴조사, 2008년 거제시에서 집수지 보수 및 복원, 2009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동문지 발굴조사 및 성내 건물지 시굴조사 등을 거쳐 2010년 문화재청에서 국가문화재 사적 제509호로 지정했다.
2012년부터 문화재청에서 복원 보수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종합정비 계획을 보면 성지(城址)일부를 추가 발굴 조사해 종합적인 원형을 고증, 복원 할 계획이다.
먼저 성벽 및 성곽 시설물을 정비하고 그 다음 성내·외곽 탐방로 설치 및 경관정비, 안내시설 및 편의시설 정비, 그 외 건물지와 망루에 대한 복원은 발굴 조사 자료에 의해서 복원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사업은 단기사업과, 장기 사업으로 구분하여 단기 사업은 성지에 대한 복원 사업이고 장기 사업은 주변에 있는 문화유적지다.
이 성의 특징은 성안에 집수지(集水池=연못)가 있다. 산꼭대기에 물을 저장 할 수 있는 연못을 만들어 군인들의 식수로 사용 하였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만큼 정교한 건축양식이다. 성 안쪽 북단에는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고, 피 묻은 몽돌이 있다. 이 돌은 적을 공격하던 무기였다. 둔덕 기성의 복원은 거제에 새로운 문화유적지와 관광 자원으로 크게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