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덕면 거림리는 983년에 기성현(岐城縣)이 설치돼 거제 전역을 통치했다.
1996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거림리 기성현지를 발굴조사 했다. 그때 그곳에서 당시의 현청이 있었던 현지에서 주춧돌과 토기편과 기와조각(瓦片) 등이 발견됐다. 기와조각에서 상사리란의 글씨가 발견돼 상군의 역사와 기성현의 역사를 밝히는데 좋은 자료가 됐다.
상사리는는 677년 상군이 거제에 설치됐는데 그 치소가 삼한시대 변한 12개국의 하나였던 두로국(瀆盧國)의 치소가 있었던 사등면 성내마을로 전해져 오고 있는데 거림리는 상군에서 넷째 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18대 의종왕(1170)이 거제도로 피신해 목숨을 구한 곳이 둔덕이다.
상장군 정중부 등의 무신들이 경인년에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을 경인난이라 한다. 고려가 안정됨에 따라 무관을 천대하고 문신을 존경하는 경향이 날로 더해 무관들의 불평이 컸다. 문신들은 매일 술을 먹고 시를 읊으며 화평재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데 무관들은 호위를 하면서 천대를 받았다.
무관의 불평이 높아지자 이를 눈치 챈 의종왕이 무관들을 달래기 위해 장군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상을 주며 위로했다. 이 자리에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의종왕은 무모한 짓을 보고도 한뢰를 나무라지 않았다.
무신들은 문신들의 방자한 행동에 분노가 폭발했다. 왕이 보현원에서 수박희 놀이를 하며 즐기고 있을 때 정중부는 이고, 이의방 등을 불러 문신들을 모조리 죽이게 했다. 그리고 의종왕은 목숨만 살려 왕궁에서 쫓아냈다. 의종왕은 말을 타고 살길을 찾아 거제도로 도망을 왔다. 왕이 기성현으로 도망을 오자 그 가족과 부하들도 뒤따라 거제 둔덕으로 와서 작은 고려국을 만들었다.
의종왕이 둔덕에 와서 3년이 지난, 명종 3년(1173)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주모가 되어 정중부 일파를 죽이려 계획하다가 발각돼 이의민에게 죽었고, 녹사 장순석 등은 거제도에 와서 의종왕을 모시고 복위시키고자 경주로 해서 올라 가던중 정중부 일파가 먼저 알고, 이의민이 경주 곤륜사에서 의종왕에게 술 석잔을 권하고 의종왕을 살해해 시신을 연못에 빠뜨렸다.
그때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구름이 끼고 천둥번개가 치면서 의종왕이 살해된 연못에서 붉은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물이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 의종왕은 47세에 비참하게 죽었다.
「高麗史二 卷十九 世家 卷十九毅宗 三年條 辛卯 王 單騎 遜于巨濟縣 放太子于 珍島縣 是曰 仲夫義方高等 領兵 迎王弟翼陽公晧卽位 明宗 三年八月 金甫當 遣人奉王 出居鷄林 十月庚申 李義旼 弑王于 坤元寺北淵上 壽四十七世 在位二十五年 遜位三年 諱曰莊孝 廟號毅宗 陵曰禧陵 高宗四十年 加諱剛果」
의종왕이 3년동안 살다간 둔덕에는 그 당시의 흔적이 아직도 잘 남아있다.
농사를 짓던 농막의 남쪽에는 대비장을 설치해 안주시킨 안치봉이 있으며 하둔리 접경에는 자주방과 여관을 뒀다.
여관은 고려사람이 와서 살았던 관문이란 뜻이다. 그곳 산록에는 방어성지가 있다. 또 산록에는 망허를 두어 감시하게 했다.
둔덕천 건너 방하리 남쪽에는 고려 시종무관 및 귀족계급의 사해를 매장한 고려 무덤이 있었다. 여기서 당시의 유품이 종종 출토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많은 고분이 있다. 그 당시 나루터가 있던 곳은 술역이라 하고, 군마를 키우던 곳은 마장, 농사를 짓던 곳은 농막, 과수원을 하던 곳은 시목, 기성현의 관아 앞에는 옥터가 있었고 옥동은 중죄를 지은 사람을 가두던 옥터다.
상둔은 나라에서 권농관을 두어 농사를 짓던 농토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둔전이라 해 윗 둔전, 아래 둔전이라 한다. 견내량은 전하가 건넜다고 전하도라 부르기도 한다.
공주가 우물을 길렀던 공주샘, 신선 마고 할매가 의종왕의 복위를 빌었던 마고 덩걸과 제신암, 빈 정승의 무덤이 있는 빈 정승묘 등 곳곳에 의종왕과 관련된 흔적들이 잘남아 있다.
의종왕이 피신와서 3년 동안 살면서 작은 고려국을 연상하게 했던 문화유적지는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정밀조사 발굴을 한 후에, 비운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국제적인 관광지가 돼야 한다.
이와 같은 여론은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와 문화재전문위원 들로부터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주민들의 여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