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그의 집이 너무 낡아 새로 지으려고 하는데 호조판서로 제수되었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러자 그날로 공사는 중지된다. 나라의 재정을 책임진 자가 집을 지으면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재물일거라는 의혹을 사게 되고, 공임을 지불할 때 판서체면에 깎거나 적게 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좀 넉넉하게 주면 그게 표준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 뒤 호조판서를 지내고 나서도 벼슬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집을 짓지 않았으니 그가 필부로 낙향한 노년에 가진 것이라고는 비가 새는 세 칸짜리 오두막 한 채 뿐이었다.
인조임금이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으로 본받을 바이다"라며 거절하는 그에게 억지로 5칸짜리 집 한 채를 하사하며 당호를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므로 모든 백성이 보고 느껴야한다'는 뜻의 '관감당(觀感堂)'이라 했다.
주근깨도 많고 생긴 것도 별로인데다가 키까지 작아 '키 작은 재상'으로 통했지만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동법을 관철시켰고, 충무공 이순신이 탄핵되었을 때 그를 복귀시키기 위해 애쓴 사람도 오리대감이었다. 그가 수령을 지낸 곳에는 생사(生祠)와 청덕비(淸德碑)가 있었으나 어두운 밤을 틈타 아무도 몰래 모두 헐어버릴 만큼 청렴한 지도자였다.
방송작가 신봉승씨가 조선의 임금 27명과 유명인사 600~700여 명 중에서 행정부를 조각했는데 대통령은 세종으로, 국무총리는 오리대감이 적임자라고 했다.
우리는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로 지명된 김용준씨가 오리대감을 닮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