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등성은 두로국 고도의 邑城
사등성은 두로국 고도의 邑城
  • 거제신문 이승철 시민리포터
  • 승인 201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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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문화산책]주민들 낙안읍성 보다 더 좋은 관광지 조성을 염원

1974년 2월16일 지방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 사등성은 둘레 986m 높이 3m로 평지에 축성된 옹성(甕城)이다.

사등성은 삼한시대 변한 12개국의 하나였던 두로국(瀆盧國)의 왕도지 였던 사등면 성내리에 축성된 읍성역할을 했다. 지형적으로 볼 때 명당지다. 계룡산 지맥이 오른쪽으로 사곡 뒤로 뻗어있고 백암산과 망산이 감싸고 있는 조용한 항구 사월포 안쪽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사월포를 벗어나면 마산·진해·부산항과 연결된다. 그리고 통영·여수항으로 거쳐서 서해로 가는 길목이다.

장평고개를 넘어가면 거제시청이 자리하고 있고, 두동고개 너머에는 옛 고도 거제면이다. 준마령 고개 뒤로는 고려시대 기성현이 있었던 거림리다. 육지로는 거제의 관문인 견내량과 가깝고 해상의 관문인 성포항이 있다. 지형적으로 볼 때 외침을 방어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며 내륙교통과 해상교통의 중심지다.

사등성은 고려 원종 12년(1271) 왜구의 침입으로 거제도 사람들이 진주 영선현과 거창 가조현 등지로 피난 가서 살다가 세종 4년(1422)에 돌아와 수월리에 목책을 설치하고 살면서 세종 8년 병자년에 성을 쌓기 시작해 세종 30년(1448) 무진년에 완성했다.

그 뒤 문종 즉위 원년(1450) 경오년 9월에 개축을 건의했으나 허가치 않아 그해 11월 정분이 경상 체찰사로 있으면서 성지를 돌아보니 성이 협소하고 물이 모자라 옮겨야 되겠다는 것을 왕에게 건의해 다음해 가을에 고정부곡, 지금의 고현으로 옮겨 고현성을 축성하게 된다.

사등성의 형체는 거북이와 같다. 사등이 평사낙안(平沙落雁) 설이라 해서 거북이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상을 해 그와 같이 성을 만들었다.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성은 대리마을 쪽 도로변과 저날등 마을 안길쪽에 문이 있다. 거북 뒷다리에 해당된다. 그리고 위쪽으로 대리마을 소도길 쪽과 기성초등학교 뒤편에 문이 있다. 이곳은 거북이 앞다리에 해당된다. 그 중간에 치가 있는데 이곳은 거북이 입모양을 하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평지 옹성이다. 성 밖에는 폭 20여m의 해자(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를 파서 적이 침입해 올때를 대비해 방어호를 만들어 놨다.

성내는 마을이 있고 일부는 전답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당시 관아가 들어 온 자리는 우물이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성곽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고현성이나 오량성과 같은 수법으로 축성했다. 이 성을 쌓을 때 경상도 사람이 동원ㄷ햐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쪽 성벽에 삼기현(三岐縣=·삼가현) 사람과 산청현 사람들이 구역을 맡아서 성을 쌓았다는 글씨가 성벽에 남아 있다. 삼가현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문 끝가지 51자를 쌓고, 산청사람들은 55자를 쌓았다는 기록이다. (三加始面가 五十一尺門末間 五十五尺山陰)

거제시에서는 사등성지 종합 정비계획을 수립해 둔덕 기성과 기성현지, 그리고 오양성과 연계하는 관광지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으로 사등성에 대한 주민공청회를 가졌다.

이날 공청회에서 주된 논란은 사등성을 정비 복원할 경우 성지와 근접하고 있는 보호구역내의 주택과 건물철거로 주민들과 의견차이가 있었다.

양일웅 주민대표를 비롯해 이날 참석한 주민들의 주장은 포로수용소 설치 때 유엔군과 한국군이 성을 뜯어다 포로수용소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을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해 보존했으며 사등성은 주민들을 위해 존치하는 성이다.

지금 더 이상 성지복원을 하는 것 보다는 이대로 보존하면서 지역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주민들이 낙안읍성을 여러 번 다녀왔다. 사등성도 낙안읍성과 같이 성내에 옛 건물을 만들고, 성밖에 있었던 해자와  당시의 골목길과 현청사 설치 터의 우물과 현청사 복원, 그리고 성내에 남은 토지지역은 조선시대의 성내 마을로 만들어 관광자원화 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공감이 간다. 성내마을 서쪽에 있는 대리마을은 두로국이 이곳에 있을 때 가장 큰 마을이다.

대리마을 뒤산에 당시의 소도(蘇塗·솟대)가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두로국 왕이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제복을 갈아입었던 고란정이 있었고,  향불을 피웠던 분향당이 있다. 솟대길 가는 곳에는 왕이 쉬어 갔던 금송대가 있다. 주변에 이런 유적들과 병행해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을 이 지역 사람들이 오래도록 염원해 왔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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