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자유를 세상에 저당 잡히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평생 찾을 수 없는 전당포에 자유를 저당 잡히지 않고서야 사는 것이 이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전 국민의 65%가 공동주택에 사는 이 땅의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웃음을 줄만큼 유익하고 자유롭고 편안할까? 명절마다 층간소음으로 이웃간 벌어지는 끔찍한 소식들을 듣게 된다.
혹, 아파트 주민끼리 함께 탄 엘리베이터가 문이 닫히는 순간 고요한 정적이 흐르며, 고개를 숙이고 저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게 되는 모습은 정말 불편하다. 또 버스 안은 어떤가? 고개를 숙인 채 또닥또닥 해대는 건 아이, 어른 구분이 없다.
하루종일 저마다 스마트폰에서는 쉴 새 없이 '카톡카톡' 해대는 소리가 이만저만 스트레스가 아니다. 그 내용도 어떤 유익한 정보이거나 새로운 소식이 아닌 대부분이 유머스런 잡글이거나 음담패설이고, 유익한 말이라도 돌고 돌아 그 좋은 글귀들이 오히려 소음이 되는 폐해를 낳게 된다.
중·고등학생 10명 중 8명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게임, 채팅, 메신저 등으로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고 한다. 마치 몸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스마트폰 없이는 말 붙이기도 힘든 현실이 되어 버렸다.
고3인 아들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보다 메신저를 통해 주고 받는 대화가 더 편하고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녀석은 서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면 대화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른들과 직접 대화할 때는 이해보다는 잘못된 것부터 지적을 하거나 화부터 먼저 내기 때문이라는 따끔한 충고를 해준다. 어찌 아이들을 나무랄 수 있으랴, 이 모든 풍경을 어른들이 만들어 준 것인데 말이다.
한국인의 인터넷 사용량은 문서를 보내고 다운로드 받는 것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무선 인터넷 서비스업체는 '영화 한 편 다운로드 받는데 몇 분'이라고 광고를 하고, 또 어떤 이는 비용이 저렴하거나 혹은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에 띄는 영상물을 습관적으로 다운로드한다. 개인이 가진 컴퓨터, 스마트폰이 가진 정보의 양은 분명 혼자 소화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해졌다.
좁은 방안에서 혼자서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만큼 지혜롭고 정서가 풍부해지고 마음이 자유로운 걸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편리하다는 이유로 내팽개쳐버린 찾지 못한 자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느 방송국의 로고송처럼 '만나면 친구되는' 다정한 이웃들과의 교감, 우리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말씀하시던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과 자유를 가로막은 것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주는 편리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끔 해일처럼 몰아치는 스마트한 기계의 편리함이 우리에게 어떤 치명적인 힘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명령만 하면 무엇이든 해결해주는 스마트폰이 결국에는 인간을 지배하는 거대한 괴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을 애써 막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삶의 환경을 바꾸고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능들이 분명 많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이 누려야 할 마음의 자유와 인간적인 풍경을 즐길 여유를 뺏기게 된다면 나중에 감당해야 할 불편함은 또 어쩌겠는가! 손자가 할아버지한테 스마트폰 영상으로 새해 인사하고 설날 리조트에서 제사 모시는 시대, 마냥 편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의 영혼이 기계에 짓밟히지 않으려면 하루쯤이라도 스마트폰을 끄고 자녀와 가보지 못한 거제도의 아름다운 곳곳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 수준에 맞는 책도 함께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기억하는 한 최초로 접해본 아름다운 풍경 혹은 그때 읽어본 책은 우리의 유년시절에 켜 있던 마법의 등불과도 같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향수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