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여전한 분야가 있겠지만 목소리를 크게 질러 대는 건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려는 위장된 위엄이고, 사회갈등을 부추겨 반사이익을 보려는 선동집단의 행태가 대부분이다. 의학적으로 보자면 늘 고성을 지르거나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당연히 간이 나빠지고 조급해 시비에 능하고 실익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회현상의 전면에 등장하는 집단 중에는 시민단체가 있다.
필자 역시 가담하고 있지만 시민단체가 지니는 순기능과 역기능의 여파는 심각하다. 늘 오가는 거제대교를 따라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멀쩡한 포장도로를 파헤치는 도로배관공사 때문에 짜증을 겪는다.
'왜 저러냐'고 물으면 가스배관공사 때문이라는 대답이어서 생활의 필수에너지를 가져오는 공사를 두고 달리 불평을 할 처지도 못된다고들 여긴다.
배관이 묻힌 해당 도로는 유일한 간선도로로 시민교통의 동맥에 해당한다.
시역의 어느 변두리에 탱크저장소를 만들어 가깝고 원활한 공급을 마련해야 마땅한데도 이런 기형적 불편을 야기한 원인이 왜 발생한 것인지는 당시 목소리가 컸던 사람들이 두고두고 자책해야 할 몫이다. 이런 부류에 해당하는 기형적 모순과 부조리가 생활의 도처에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성장의 가치가 우위에 있었고, 상대적으로 복지와 인권이 뒤쳐졌던 우리의 현대사에서 그나마 큰 목소리로 약자를 대변하고 항변했던 현상을 질타하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아직도 성숙한 환경을 외면하고 대안 없는 구호성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정치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데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등장이 스스로의 권익에 유일한 수단이라도 될 것으로 생각했던 당초의 기대가 무색해 버린 것도 준비되지 않은 큰 목소리들의 충돌이 적잖은 이유다.
여기에 개인이나 집단, 지역의 이기심이 가세하면 도대체 어느 게 선이고 악인지 헷갈리는 갈등의 무대가 만들어진다.
본시 연구와 분석으로 학문을 열고, 정성과 땀으로 생산을 유발하는 사람들은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목소리를 천업으로 여기는 가수들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되도록 낮고 섬세한 속삭임처럼 노래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도 되짚어 볼 대목이다. 실력과 지략을 가진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인간은 지각知覺하는 것 만큼 행동한다'고 여긴다면 큰 목소리를 내기 전에 스스로가 뭘 지각하고 뭘 표현할 것인지를 인식하는 훈련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글로벌 경쟁시대에 사는 변방의 작은 지역에서 주변의 변화와 내부의 요구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이기적으로 배운 하찮은 경험이나 지식만으로 지역발전에 선두에 서겠다는 사람들은 염치를 배워야 한다.
전문가들의 기획과 행정가들의 노력이 곁들여진 개발 사업이 이기심과 감정에 몰입된 큰 목소리에 묻혀 무산되거나 기형화되는 일들은 이제 자제되어야 한다.
물론 아직도 행정관청에는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공직자들이 인허가권을 자신의 전유물처럼 휘두르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정치적 사업을 예사롭게 벌이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를 시정하고 합리화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도 착실한 대안과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설득할 자질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이해심과 관용이 보이는 사회가 곧 성숙된 인간중심의 사회이고 우리가 언필칭 선진국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면 배타심으로 큰 목소리부터 내고 보는 구습들은 이제 제고돼야 할 타성일 것이다. 가족을 향해 호령하고 헛기침이 대문을 흔들던 조부의 완고하시던 아집도 더러 사랑이 지극해지면 알아들을 수 없는 독백으로 어둠을 홀로 지키시던 모습을 떠 올리면서 이제부터라도 우리 사회가 상대적 처지와 애로를 함께 소화하는 성숙된 모습으로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