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의심도 지나치다. 자기주장과 맹신을 하는 이면에 못나고 나약함을 스스로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비겁함을 내재한 무기가 겉으로는 표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역사가 있고 객관성이라는 논리가 있다. 고집 센 사람이 이런 것을 부정(부인)하려 들면 언젠가는 파멸의 운명을 예감하게 된다.
대선의 와중에 우리들은 숱한 우려와 갈등을 겪었다. 개개인의 소신에 의한 당락을 염두에 두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 치도 상대를 용납 못하는 품위와 저열한 언행은 보기에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역사를 꿰뚫고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이것이 우선, 상식과 예의에 벗어나면 곤란하다. 어느 편을 지적해서 라던가 선호의 대상을 자기편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도 일부 지도자간에 아주 여전히 소위 발목잡기의 저지현상이, 굴러가야 하는 수레의 그마저도 같은 방향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도 좋고 장래의 두려움은 총력을 정점에 두었을 때 바른 판단이 선다고 본다. 그야말로 정수리에 진땀이 고일만큼 사태가 심각한 것일까? 이러한 의심과 두려움이 혹시 소아적인 인격의 고갈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맞서는 상대가 숨겨진 모습이 아니라 보는 자기편의 잣대로, 초점없는 각도를 억만으로 굴려서는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가치차원이 달라야 한다. 마음과 몸을 다 얻는 데는 변화하는 모습이 감지되어야 한다. 그 변화는 쉼없이 새롭게 전진하는 것이다. 이미 투명성을 제시하며 공감영역을 확실하게 들어내고 있는 상대라면 함께 나아가는 일에 타협과 양보와 배려가 우선시 된다.
깔려있는 레일은 우리 모두의 믿음일 때 더욱 소중하다. 레일 위에 수레를 놓는 일은 방향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이다.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믿는다. 절절한 기도와 숭고한 기원을 얹어 혼신을 다하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종교적인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먹고 사는 생계의 삶 그 위에 위협을 가하는 먹구름이 가히 폭력적으로 전 방위에서 동조되고 있는 현실이라면 우리들은 무엇을 먼저 해야 는 것일까? 국가 안보가 시급해지고 있는 데는 공감 이상의 문제해결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 수난의 일에 부닥치면 먼저 의식을 되찾고 정신을 차리는 일이 급선무다. 살아난 다음에는 주변을 살피고 대개는 상해의 잘잘못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을 가상해보면 가족과 연분 이상으로 공동체의 결속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붕괴와 멸망은 제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위기를 대처하는 구급의 큰 힘 역시 한 목소리를 탑재한 내실과 단결임을 자각하고 더 이상 발목잡기 식의 국정논의는 없어야 한다. 반성하고 용기를 잃지 않는 데에 우리들의 희망은 살아난다.
최근 북한은 국제교류의 순리를 벗어나 핵실험에 의한 주변을 위협함으로써 자강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인류의 보편적 확신은 대응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순리에 역행하는 광폭적 자만은 끝내 용서받지 못한다.
인류는 어느 겨레를 막론하고 수백 년 수천 년에 쌓인 진정한 힘겨루기의 승리를 더욱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쇠붙이와, 파편과, 그리고 독약을 이기는 길도 알고 보면 식물성의 녹색 생명의 힘이다. 나무가 단단하면 웬만한 강철을 부러뜨리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살 속에 품고 자라며, 이기게 마련이다.
국민이 흐트러지지 않고 절박할수록 한 목소리로 대치될 때 핵무기에 응변할 수 있는, 두려움 없는 승리자가 되어 어떠한 재난도 단결의 앞에는 범접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