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화면속의 인물들이 예사롭지 않다. 이름만 들어도 단죄하고 싶은 험악한 '쌍칼', '용팔이'란 두 사내가 생뚱맞게 어두운 뒷골목이 아닌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다.
'훌륭한 사람은 히말라야처럼 멀리 있어도 빛나고 몹쓸 사람은 밤에 쏜 화살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라는 법구경의 말씀이 무색하게 그 '몹쓸사람' 같은 사내들이 신성한 히말라야의 품 안으로 한 발, 한 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1987년 통일 민주당 창당 방해를 위해 조직 폭력배를 동원한 이른바 '용팔이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먹계의 살아 있는 전설 용팔이 김용남과 그의 칼잡이 노릇을 하던 쌍칼 김정운이다.
그들은 그 사건으로 15년간 옥살이를 했다. 세상의 법으로는 단죄 받고 씻김을 받았겠으나 그들은 여전히 죄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정운은 보스 김용남이 자신을 돌봐주지 않고 금전적으로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복수의 칼을 간다.
김용남 역시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참회의 길을 걷고 있지만 자신 때문에 그릇된 길을 가게 된 후배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있다. 용서하지 못한 자와 용서 받지 못한 자 모두의 고통 앞에 히말라야가 용서의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이제야 히말라야 앞에 섰는가? 사람이 한 번 빠지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이 정치계와 폭력계라고 김용남은 말한다.
그 맛에 빠지면 스스로 물러날 생각은 없어지고 무참히 끌려 내려올 때까지 물러나기가 싫다는 말이다. 정치의 주변머리에서 돌던 그가 목적을 상실하고 탐욕과 집착만 남은 정치 현실을 비꼰 것이다.
남아프리카에는 스프링벅이라는 온순한 양들이 살고 있다. 비교적 건조한 사막같은 초원에서 잘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런데 양떼들의 무리가 커지면 풀을 뜯는 과정에서 앞의 양들이 풀을 다 뜯어 먹어버릴 경우 뒤에서 풀을 뜯던 무리는 풀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이 벌어져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앞선 양들은 뒤의 양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더 빨리 풀을 뜯으며 앞으로 달려간다.
그러다 갑자기 양떼들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새로운 풀을 찾기 위해서였으나 나중에는 이유도 모르고 그저 내달리며 멈출 수조차 없게 되어 결국 벼랑 끝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살아나오는 녀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풀을 뜯기 위해 나아갔지만 목적을 상실하는 순간 이유없이 달리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된다는 실제 이야기다.
조금만 달리다 멈추어도 새로운 풀을 찾을 수 있었을텐데 멈추지 않고 무작정 달린 탓에 자신들이 왜 달리는지조차 잊어버린 탓이다.
잠시 멈추어서 나를 멀찌감치 바라보자. 우리 역시 탐욕과 집착에 빠져 삶의 목적도 방향도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숨을 고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와 용서하고 화해하며 살아가야 할 일인지 히말라야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화해하는 거친 사내들의 멈춘 발걸음에서 배울 일이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세상의 욕심에 눈이 멀고 그것에 집착하여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내는 것보다 죽어가는 것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에게도 깨달음의 순간이 필요하다.
벼랑을 향해 치달리는 양떼처럼 죽어가는 삶을 피하기 위해서는 '나는 오직 족함을 알 뿐이다(오유지족·吾唯知足)'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김질할 뿐이다.
그러나 족함을 안다는 것은 전혀 안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없는 것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일진대 필요한 것조차 필요한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보니 상기와 같은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