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에 가면'이라는 게임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시장에 가면 배추도 있고~'라는 레퍼토리를 단어만 바꿔 반복해 차례대로 이어가는 게임이다.
이처럼 '시장'하면 누구나 공감하는 몇 가지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정겨운 냄새가 있다. 그 고소한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참새도 반했다'던 방앗간이 보인다.
능포동 옥수시장에도 어김없이 그 명성을 이어가는 방앗간이 있다. 시장 왼편 끝에 위치한 '대구방앗간(대표 이길순)'이 바로 그 곳이다.
가게 입구에는 주인 이 씨가 직접 만든 고춧가루와 미숫가루가 진열돼 있고 국내산 검정콩 참깨 쌀 녹두 등 여러종류의 잡곡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가게 내부에 들어서면 참깨·들깨 볶는 냄새가 그득하다.
그렇게 정성스레 짜여진 참기름·들기름은 투명한 유리병에 담겨 팔려나간다. 한참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물 잔뜩 넣고 비빈 비빔밥 한 그릇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지사.
이 씨는 15년 전 부산에서 공직을 마치고 명예퇴직을 한 남편과 함께 고향인 거제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렇게 우연히 방앗간을 시작하면서 이 씨 부부는 평소 인정받은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방앗간을 운영해왔다고.
그는 "20~30년동안 방앗간을 해온 다른 가게들에 비하면 아직 미숙한 실력이지만 국내산 재료만 고집하고 만드는 과정은 다른 기계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해내 깨끗한 식품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젊은 세대들은 곡물을 직접 빻아 먹기보다 마트나 슈퍼에서 사먹는 일이 보편화돼 손님이 급격히 줄었다.
또 곡물가격도 일정하지 않아 직접 가게에서 구입하는 곡물보다 손님들이 손수 챙겨오는 경우가 많아져 노동량에 비해 수입이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 씨는 "요즘은 우리가게 뿐만 아니라 방앗간 자체가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며 "그래도 자신의 가게를 소유하고 일정한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보람찬 일도 있는 법. 한 번은 "일본에서 김치장사를 하는 시누이에게 매번 직접 빻은 고춧가루를 보내주다 사정이 생겨 잠시 가게 문을 닫게 됐는데 일본에서 우리 고춧가루 맛에 매료된 사람들의 항의가 들어와 시누이가 직접 부탁하러 한국을 찾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독일에 있는 지인에게도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맛있다며 극찬해 몇 번 더 부탁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해외를 사로잡은 맛은 국내 서울이나 경기도 등 대도시에서도 정기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형성된 연결망은 손님을 가게로 발걸음하게 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고.
그는 "단골들이 저마다 '언니 없으면 우리 어디서 사먹어, 내가 필요로 할 때까지 가게 그만두지 마'라는 말을 장난스레 건넬 때마다 하는 일에 자부심을 크게 느낀다”고 한다.
워낙 '손맛'과 '좋은 질'을 추구하다 보니 고추장이나 간장 담그는 일도 직접 한다는 이 씨. 젊은 손님들도 이 비법을 전수 받기 위해 찾아오는 일도 많아졌다.
그는 "요즘 같이 식품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에 정직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손님들이 알아주길 바란다"며 이어 "재래시장 활성화에도 적극적으로 힘써 시장 상인들이 힘을 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가게를 벗어나 한동안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를 떨치지 못해 한나절 굶은 기자의 배꼽시계가 끊임없이 울렸다. 당장이라도 고춧가루로 만든 얼큰한 찌개와 진한 참기름이 들어간 비빔밥, 고소한 미숫가루 한 잔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