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시비와 진실규명의 가치
역사시비와 진실규명의 가치
  • 거제신문
  • 승인 201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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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석 칼럼위원

▲이아석(남해안시대포럼) 의장
역사란 늘 그래왔듯이 승자의 몫이다.

패자와 죽은 자는 침묵하고, 햇빛을 받은 역사는 정사(正史)로, 달빛을 받으면 야사(野史)로 변하는 게 세상인심이요, 역사의 메카니즘이다. 그 옛날 장대비를 맞으며 회군을 고심했던 이성계는 늘 한 발 앞 서 살육과 선점에 급급했던 아들 방원의 돌출행동을 염려했지만 태조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게 무슨 예단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후의 언행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 흥망의 와중에서 살육되고 고통 받은 사람들의 희생과 원통함은 기록조차 모호하다.

그러나 오랜 역사의 진실과 가식은 연구와 조명에 의해 드러날 수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진실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현대사의 혼란스러운 사건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사심과 이기심과 오해가 빚어내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거제의 지명을 두고도 들추어 낼 자료가 부족해서 여러 해석이 많다.

알려진 표현 가운데는 독로와 당도와 거제가 있지만 여기에 대한 해석 또한 시원찮다. 불과 반세기를 조금 지난 사건들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다.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친일논쟁과 함흥철수작전에 있었던 공적이 균형과 진실을 찾는데도 갈등이 적지 않다. 미군에 의해 성공하지 못한 동북 지역 북진과 갑작스런 중공군의 남하로 인한 함흥철수의 군선에 편승한 피난행렬이 과연 얼마만큼 인도주의적 가치를 신장하고 기념비적 조형물들을 만들어야 하는 가에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친일행각을 연구하고 전쟁자료를 분석할 줄 아는 전문가들이 과연 얼마만큼 여기에 몰두하고 사실규명에 철저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미미한 사실 하나로 기념비적 사업을 확대 생산하는 측의 조심성도 두고 볼 일이다.

양비론적 견해로 접근하려는 게 아니다.이 문제에 관한 한 긍정적인 측과 부정적인 문제 제기 간에 충돌이 있음은 이미 드러났지만 과연 그 진실성에 관한 연구와 해석에 얼마나 충실했는지의 여부는 별개다.

또한 기념비적 사업에 있어서의 규모와 시설이 어떤 합의와 공론을 거쳐 가치에 적합한 행태로 진행되어야 하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역사문화에 대한 분석과 이해의 정도는 사람마다 거의 다를 만큼 미묘하다.

여기서 다르다고 하는 의미는 때에 따라 심각한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에 의한 분별 잃은 처단으로 오랫동안 가문의 비극을 몸소 경험했고 그 여파가 좀체 지워지지 않지만 그런 폐단에 아랑곳없이 현실 정치에 대한 긍정과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은 승자정치에 익숙해진 탓이기도 했다.

그것이 교육에 의한 것이든, 존재감에 대한 애착인지는 모르지만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역사적 인식조차 없었던 어린 시절의 비애를 새삼 탓하려고도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철이 들 무렵이면 사람들은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특정 세력이나 타인을 목표로 하는 의도성도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정의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자기존재에 대한 정의감이 곧 공동체의 정의감에 대한 참여이고, 구성원의 도리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역사적 성장과 변화가 기득권의 고질적 배타성에 부딪치면 갈등이 유발되고 시비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시비나 진실에 대한 규명 노력을 극단적 대립이나 갈등으로만 몰아 갈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의 다양화와 가치 수용을 위한 과정으로 보는 측이 옳을 일이다. 구조물로 생겨났던 역사적 인물이 밧줄에 목이 감겨 내동댕이쳐지고, 미래의 또 다른 해석이 오늘의 판단을 무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시대의 변화가 주는 진보의 일환일 수 있다.

완전무결한 판단이나 사실을 원하는 욕망은 올바른 역사인식도 아니고 자세도 아니다. 관건은 그런 시대적 과제들을 수렴해 나가는 공동체의 정신과 방법이다.

상대를 극단적으로 몰아세우거나 폭력을 동원하는 일을 자제할 수만 있다면 갈등과 대립의 정신은 치열한 역사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힘이 될 수도 있다.

혹여 이런 사안을 보도하거나 반영하는 언론이나 비평가들이 보다 진지하고 대안을 찾는 방식의 접근성만 갖는다면 역사문화의 시비나 진실규명은 투쟁이 아니라 합의를 위한 에너지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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