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근 진주·산청·거창 등지에서 내려 온 예비 승선 인가자 5000여 명의 사람들과 서울ㆍ대전ㆍ대구 등에서 승선인가를 얻지 못한 사람들까지 몰리면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암표 구매를 위해 서로 싸우다 죽어가는 숫자만 상당했다.
세계 각 정부는 70도를 오르내리는 온난화와 더 이상 식물이 자랄 수 없게 된 지구를 버리고 해저비상공동국가를 설립하기로 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기술지원단, 그 가족들만 1차 승선자로 발표하였다. 전 세계의 해안가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불안감속에 해저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이런 상상을 해봤다. 사람들마다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거제에는 장마철에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는 말을 인사처럼 투정하는 요즘 같은 뜨거운 시절에 환경재앙이 시작된 지구를 버리고 해저세계를 꿈꾸는 상상을 해 봄직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영화 속 장면 대부분이 열차 속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극도의 긴장감이나 가슴 설레임이 없었던 것은 이미 좌절된 희망부터 시작된 이야기이며 애절한 러브스토리 하나 없었던 건조함 때문이었을까?
환경이 파괴되고 온난화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먼 미래에 동서양 군비경쟁 속에 기후라는 무기가 사용되고 영하 90도의 설국으로 변한 지구에서 유일한 생존처인 1001량의 끝없이 달리는 열차속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 이야기다.
17년째 달리고 있는 설국열차 속 꼬리칸의 참혹한 삶을 보며 오랜 시간동안 혁명을 준비한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꼬리칸 동지들과 열차의 심장 엔진을 차지하기 위해 앞쪽 황금칸을 향해 전진해 나간다.
감옥에 있던 열차 보안설계자 남궁민수를 설득해 꼬리칸의 혁명을 시작한 주인공 '커티스'는 부유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황금칸을 차지한 기득권자들과의 싸움에서 과연 꼬리칸 사람들에게 희망과 평등을 돌려주었을까?
결말은 점점 눈이 녹아가는 설원에 유일한 생존자 두 아이만 남겨 둔 채 미완으로 끝나버린다. 희망이라면 설원 속에 나타난 흰곰의 생존이 지구의 회생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영화를 생각하면 아직까지 열차 속인 듯 덜덜거리는 느낌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환경'과 '권력'이라는 두 단어가 머릿속을 채우고는 정신없이 맴돌고 있다.
지난 정부의 4대강 공사처럼 권력이 환경을 파괴하는 경우는 잘못을 뉘우치고 자연환경 앞에 솔직한 처신을 해가면 그래도 희망적이겠지만, 시기를 놓치고 온난화에 대한 대책없이 풍요 속 파괴와 소비만 쫒다가 결국 환경이 권력을 파괴하는 시절이 온다면 나약한 인간은 좌절된 희망만을 바라보며 죽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다. 권력 속에는 돈도 있고 힘이 생기고 사람들을 원하는 곳에 모을 수도 있으며 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열차 꼬리칸 사람들의 평화와 평등, 삶의 질 개선을 위한 혁명이었지만 결국 주인공 커티스도 열차 내부를 잘 통제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고 치졸하고 더럽고 허무하기도 한 권력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닐까?
그도 결국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만 있고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종족보존조차 통제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권력쟁취가 좌절된 희망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러한 좌절된 희망을 안고 불안감에 시달리는 황금칸 사람들이 마약과 술에 빠져 죽음을 향해 달리면서도 꼬리칸의 잔인한 희생을 통해서 기득권을 지키고 싶은 것 또한 권력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권력이 환경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금 우리는 끝 모를 풍요 속에 살고 있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어떤 환경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연환경은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지배할 수 없다.
인간은 환경의 영원한 임차인일 뿐이다. 2070년 우리의 자손들이 좌절된 희망을 안고 살지 않도록 자연환경과 권력의 잘 조합된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