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속도
삶의 속도
  • 거제신문
  • 승인 201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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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 칼럼위원

▲ 윤병운 경남친환경농업인연합회 거제지부장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부터 나는 나이를 거꾸로 먹기로 했다. 반백살이라는 쉰의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마흔 아홉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이리 먹었으니 거꾸로 가는 시간을 지내는 ‘벤자민 버튼’의 홍안을 언젠가는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바쁘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누우면 하루 일과 속에 놓쳤던 시간들을 되새기고 다가올 내일의 시간들을 미리 쪼개어 놓고 셈을 해 둔다.  지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두려움에 갇혀 지금 ‘누려야’ 할 안식의 시간마저 바삐 허무하게 흘려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하루는 24시간이고 일년은 그 24시간이 365회 반복되며 그것은 아주 길어야 백년 안에 끝이 난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해가 뜨고 지기까지 우리가 가진 시간은 매우 길었다. 동이 트면 차가운 세숫물로 아침을 깨우고 따뜻한 밥상을 기다려 배를 불리면 하루 종일 동무들과 재미있는 놀잇감을 찾아다녔다.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사방에 놀잇감이 널려 있었고 기특하게도 간식거리마저 찾아 먹을 줄 아는 재주도 있었다. 날이 저물어 까막중처럼 하루의 때를 흠뻑 둘러쓰고서야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우면 누구도 이런저런 것들을 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는 내일을 설렘으로 기다리며 곤히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각자의 삶이 틀을 갖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인생의 목표라는 것을 향해 시계바늘을 움직이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생은 바쁘게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실체는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이 시간은 각자의 목표에 맞추어 규격화되면서 그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 각기 다른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자칫 틀 속의 삶에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늘 불안과 초조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재빠르게 진입하기 위해 학습의 중압감에 시달려야 하고 청년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스펙을 보증하는 종이뭉치들에 목숨을 건다.

돈, 명예, 권력, 지식 등등 가진 자가 존중받는 세상에서 못가진자는 결국 무시당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들은 쏜살같은 인생의 시간을 빈틈없이 쪼개어 쓰지 않고 쉬엄쉬엄 보낸 댓가를 치른다고 평가받는다.

흔히들 올림픽에서 ‘100m 달리기’를 육상의 꽃이라고 한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극복해내는 그 성취감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올림픽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가장 오랜 시간을 지켜봐야 하는 ‘42.195km 마라톤’이다. ‘100m 달리기’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가장 빠른 사람이지만 마라톤은 꼴찌에게도 박수를 보내며 많은 의미있는 참가자들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가 짦은 순간에 목표를 쟁취하고 승부가 확연히 나뉘어지는 100m 달리기보다 마라톤에 인생을 대입시키는 것도 여러 가지 모습을 보고 느끼게 하는 느린 시간의 여유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삶은 거미줄이 하루가 다르게 복잡하게 짜여지듯 하는데 ‘비워라, 단순해져라, 멈춰보라’는 등의 말들이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에는 만만찮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몹시 기다려 하루가 일일여삼추처럼 느껴지지 않는 한 세상은 바삐 돌아가고 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더욱 바빠지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학교를 데려다주는 자동차는 등하굣길에서 동무들과 나누는 속삭임을 앗아갔다. 

빨래터에서 정담을 나누며 노동의 시간을 즐겁게 보냈던 아낙네들은 이제 세탁기를 돌려놓고 대중목욕탕에 둘러앉아 근심스런 얼굴로 밀담을 나눈다. 수박 한 덩어리가 생기면 얼음 조각으로 몇 배의 양으로 불려 놓고 동네잔치를 벌렸던 인정은 커다란 냉장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을 벌이기 위해 만든 많은 것들을 가졌지만 잃은 것도 많으며 또 다른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삶의 속도란 것도 각자의 가치관에 달려있는 것이어서 정신없이 속도를 내는 바쁜 삶도 본인에게는 행복일 수 있다. 다만 세태가 그런 것을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너나 할 것없이 획일화된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목표만을 향해 달리며 속도를 내는 것이 염려스럽다.

다행히 최근에는 스스로 느리게 사는 삶을 선택하여 자연을 가까이 하며 소박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거꾸로 가는 시간을 지내는 홍안의 늙은이들이 늘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입추가 지났음에도 무더위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위를 불평하며 찬바람 부는 가을을 기다리고 앉아 있기보다는 갓 구운 김처럼 바싹 마른 수건을 목에 두르고 천천히 가을을 향해 무르익는 시골길을 걸어보자.

무덥지만 걷다 보면 차를 타면 지나칠 수 있는 냇물에서 더위를 식힐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인심 넉넉한 시골 아주머니에게서 삶은 옥수수를 한 광주리 얻어 탁배기 한 사발 할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에 갇힐 필요도 없고 오지 않은 시간에 막연히 두려워 할 필요는 더더구나 없다. 과거는 추억으로 주어졌던 시간에 감사하고 스스로 올 시간은 희망으로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쫓기며 쫓아가며 허둥대는 오늘이 되지 않게 ‘다시 못 올 오늘의 이 뜨거움을 즐기세요’라고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주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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