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이나 나라를 위해 공인을 자처했으면 개인적인 물욕이나 사심을 초월해야지 권력도 얻고 돈도 벌겠다는 모리배 적 발상은 아무리 선진국을 외쳐대도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열등국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창피를 당하는 지경이다.
그보다는 겨우 초근목피에서 벗어 나 이토록 어려운 경쟁사회에서 하루살이가 고통스러운데 권력을 이용해 축재를 하고 저만 발 뻗고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불편부당한 작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분노가 들끓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지경을 만들기까지 자의든 타의든 뇌물성 거액들을 준 아첨꾼들이 있었을 것이고 안하무인의 전횡을 가능토록 하는 무소불위의 대통령 단임제가 이런 행태들을 양산한다고 투덜대는 측도 있다.
그런가하면 늘 우리 사회가 살아있는 권력 앞에 숨을 죽이다가 죽어버린 권력 앞에서는 온갖 저주와 분노를 쏟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기회주의적 정치평론가들까지 싸잡아 달갑지 않은 정서를 나무라는 측도 있다.
왜 개인의 치적을 위한 일도 아닌데 흐트러진 강줄기를 고르는 일을 지켜보다가 의자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또 다른 권력의 편에 아부한다고 감사원장을 성토하는 분들을 보면 죽은 권력과 산 권력을 오가는 기회주의자들이 한번쯤 느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개인이고 조직이고 간에 사람 사는 일을 보면 언제나 의리를 저버리고 시류 앞에 나서서 어제를 모른다는 식으로 꼴같잖게 변신하는 무리들이 있다.
비록 죽은 권력이라지만 굳이 그런 세력을 엄벌하려면 과거 정권들의 책임자들을 향해 입에 오르내리는 의혹들을 공평하게 조사해야지 마치 교정에서 왕따를 당하는 나약한 학생 같은 처지를 함께 두드리고 즐기는 모양새는 어쩐지 마땅치 않다는 여론도 있다.
어느 것이 정도이고, 그저 근지러운 곳을 긁어대는 처방이 옳은 일인지는 다시 역사와 세월이 지켜 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용돌이에서 우리가 좀 더 성숙되고 가다듬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다. 단죄를 그만두라거나 부당한 처사를 덮어두라는 정서도 문제지만 쓰러진 자의 옷 속에 감추어 둔 장물을 회수하는 방법이 구경꾼들의 아우성으로만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 쓰러진 자와 함께 수많은 세인들 앞을 휘젓고 다니면서 공모했던 하수인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또 다른 산 권력 앞에서 부화뇌동하는 현실을 만만히 보아서는 우리 사회가 성숙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이라도 또 다른 권력의 변화가 생기면 똑 같은 행태를 보일 것이고 그런 기회주의를 수용하는 사회는 당당한 정의와 존엄의 가치가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칠 것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이나 역사는 죽은 교육이고 죽은 역사다. 죽은 권력 앞에 용감하고 산 권력 앞에 비굴한 군중은 민주주의를 얻지 못한다. 약한 자 앞에 교만하고 강한 자 앞에 비굴한 사람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존엄의 근본을 망각한 이웃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미국의 한 마디 충고에는 온갖 촉각을 세우고 눈치를 살피면서 피해와 수탈의 고통을 호소하는 주변국들에게는 교만과 독선과 건방으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일찍이 그들을 깨우쳐 주고 문물과 교화로 선린의 운명을 나눈 주변국들에게는 못된 야심과 행패로 일관하는 후안무치한 집단의 근성을 버리지 않고 있는 꼴이다.
만약 그런 일본을 나무란다면 우리 사회의 내부에서도 언제나 힘과 부의 위세 앞에 당당한 군중이 있어야하고 비록 지난 역사의 단죄나 평가라고 해도 냉철하고 공명정대한 합의를 생각해야 마땅하다.
굳이 마땅한 비교가 아닐지언정 현대사의 한일역사를 오류시켜온 세력들이 엄연히 정치판을 농단하고 있고 지금의 현상들이 숯이 검정 나무라는 식의 자가당착을 연상케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떠 올린다면 무엇을 삼가고 경계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역사가 늘 반복된다고 여기는 학자들에게 정의롭지 못한 단죄가 어떤 결과를 더 양산할 지는 묻는 것도 부질없는 것일까.
단지 뉴스꺼리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권력의 성쇠보다는 우리 자신들의 내부에서 단죄보다도 더 허전하게 잃어버리는 다른 것들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