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키기 싫은 기억이지만 IMF환란의 조짐이 보인 정황은 그해 추석 무렵부터였다.
당연히 명절 대이동이 시작되어야 할 판에 철도와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귀향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선물 뭉치들은 가볍고 빈약했다. 그걸 보고 TV뉴스앵커들은 연휴 일정이 분산되어 붐비지 않는 명절을 지낸다고 엉뚱한 해석까지 곁들였다. 빈부차이가 벌어진 후 비교적 생활수준이 중산층을 능가하기 시작했던 언론 종사자들까지 당장 닥칠 환란이나 고통 받는 층의 무게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의 본분까지 외면하던 때였다.
추석 휴가 지나기 무섭게 도처에서 기업과 자영업이 도산하고 분수를 잊은 채 낭비와 투자에 골몰했던 사람들의 가계가 무너졌다. 당시 프랑스나 일본의 정부 각료들이 사는 아파트 평균 면적이 27평을 오르내릴 때 한국의 졸부들과 몰지각한 중산층들은 대형 호화아파트를 선호했고,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의 주변국들 사이에 한국의 경제 재앙이 올 거라고 수군거리고 있어도 누구 하나 권력층에 그걸 진언하는 공직자들과 언론도 보이지 않았다.
나라의 재앙을 두고 일부에서는 마땅히 겪어야 할 회초리가 날아 든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방자치단체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시민들의 처지는 아랑곳없는 청사를 짓거나 의원들의 해외나들이에 경쟁하듯 나섰다.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운영을 자체적으로 부담시키고 부채를 해결하라면 도산하는 단체가 절반을 넘어 설 것이다.
가계나 지역이나 정부나 기업들이 모두 만성된 과분수와 그릇된 이기심에만 사로 잡혀 한치 앞을 모르고 날뛰었던 급성장의 후유증이 그렇게 터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올 추석은 우리 사회가 제 분수를 찾아 그 분수에 알맞은 복지를 누리고 성숙한 시민들이 알뜰하고 검소하게 의식주를 구리면서 언제 닥칠지 모를 충격들을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
지방의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정말 내 지역 내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열정과 시간을 바쳐가며 시민들의 혈세를 살피고 참된 복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도박과 한탕주의, 남이야 어떻게 되든 투기와 반사이익을 위해 설쳐대는 악덕부동산 브로커들은 공동체의 가치를 깨닫고 자숙하고 있는 것일까. 인성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을 받은 세대들은 이제 윤리와 도덕의 사회근본을 스스로 배워 노소의 질서와 윤리를 알고 생명의 존귀함과 노동의 신성함을 깨달아 가고 있는가.
수많은 주제가 있겠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어릴 적 교육기관에서부터 분수와 염치를 가르치지 않고 경쟁의 열기와 기회주의적 승산을 가르치는 나라, 자연의 섭리로 빚어내는 추석절의 자연적 수고를 가르치지 않고 휴일을 셈하며 가족의 화합을 흩어지게 하는 사회, 사회복지의 잣대를 허장성세의 시설과 예산으로 재단하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치권력에 빌붙은 세력들은 포플리즘에 흥이 난 모습이지만 흰머리를 쓸어가며 밤낮을 잊고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들은 그 권력 나부랭이들의 세도에 정도를 잃고 만다.
금권의 위력이 모든 걸 지배한다고 믿는 이 나라의 기득권 세력들은 마을마다 지방마다 유지라고 자처하는 해바라기들로 선거를 전횡하고 공천이라는 배후의 검은 손으로 악수를 남발하고 다닌다.
입으로 민주를 외치고 국민을 앞세우는 선거꾼들이 갖는 낡은 선동과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이 어느 하나 피부에 닿지 않아도 애국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 땅의 선량한 군중은 그들이 또 다시 만드는 기득권의 잔치에도 그렇게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혁명이 아니고서는 전체적인 사회 부조리를 뒤엎지 못한다고 한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낡은 교조주의자들 마냥 불온한 좌익논리로도 접근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다.
우리가 수천 년 농경사회의 유산처럼 받드는 이 명절의 분위기라는 것이 달라진 세상의 가치와는 별개로 그나마 가족과 친인척의 유대를 이어나가게 하고 있는 유일한 역사윤리라면 우리가 이런 기회를 통해 공동체의 분수나 개인적 책무의 몫을 한번쯤 점검하는 것도 가치있는 사회성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할 일이다.
추석이 주는 어휘는 우리에게 그것이 한가위의 자연성과 풍요를 말해야지 그저 해마다 생활구도에 매달리는 의례적인 휴일로 다가 온다면 어떤 보람도 논하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