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정상적인 편찬이 이루어졌다면 순종임금까지의 실록이 있어야 하나 고종이 붕어한 1919년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고종부터는 실록을 편찬하지 못했다.
실록 중에 가장 부실한 기록은 임진왜란을 맞은 선조 때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갈 때 사관들이 그동안 기록했던 무거운 사초를 짊어지고 따라가다가 왜군이 뒤따라오자 사초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선조실록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훗날 ‘수정선조실록’을 간행했어야 할 정도였다. 이조차 당쟁에 휘둘러 당대의 인물평가나 기록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서는 사초가 필요하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임금이라 해도 볼 수 없고 편찬에 관여한 신하는 내용을 발설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신을 비판한 글을 있는 것을 발견한다. 때마침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시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된 것이라 문제 삼아 연산군을 꼬여 사림파(士林派)를 모두 제거하고, 김종직은 무덤 속의 관을 꺼내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한다. 무오년에 일어난 일이라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해야 맞지만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영조임금은 실록을 편찬하기 전에 사초를 물에 씻어버리는(洗草:세초) 일을 저질렀다.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일이 훗날 실록에 실리는 것이 두려워 승정원일기 1년 치 사초를 세초해 버린 것이다. 원래 세초는 실록이 다 만들어지고 나서 사초를 적었던 종이를 세검정에 가서 씻었는데, 이는 종이를 재활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내용 유출을 막는 한 방편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사초에 해당하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있니 없니 하더니 이제는 그걸 고쳤니 안 고쳤니 하는 부끄러운 싸움이 해외뉴스 토픽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