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색깔론에 대해 중간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을 해 볼 필요성을 주장하던 의견에는 아랑곳없이 친구는 내 몸에 의도치 않는 옷을 입히고 만다. 그러고는 연락이 없다.
정치가 시끄럽다. 그래서 나라가 복잡하고 백성들은 혼란스럽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세상은 나더러 좌, 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어느 편이라도 들지 않으면 낙오자라도 될 듯한 분위기다. 끊임없는 갈등을 생산할 뿐 해결은 어렵다.
개인적인 갈등은 만나서 천천히 대화로 풀든지 시간이 지나면 어떤 계기로 우연히 해결되기도 한다. 또 특별히 상호이해가 필요한 관계가 아니면 만나지 않아도 사는데 어려움이 없다. 내가 그 친구와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다지 큰 불편이 없다.
다만 상처로 남아 있을 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수가 60억이라면 60억 개 이상의 상처가 존재한다. 그 상처를 하나하나 치료하면서 살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듯싶다. 하지만 갈등이 집단으로 발생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어떤 단체나 조직의 유니폼이 멋있어 보이고 함께 한다는 소속감 때문에 편안함까지 보여준다. 사람들이 유니폼에 열광하는 이유가 공동체에서 낙오되는 것이 두려워 유니폼을 벗지 못하는 것이겠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집단의 첨예한 갈등들이 곳곳에서 심각한 위기로 부닥치고 있다. 좌우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
우측으로 도는 팽이를 억지로 좌측으로 채를 내리치면 팽이는 멈추고 만다. 마찬가지로 좌측으로 돌고 있는 팽이에다 우측의 채를 내리치면 죽고 만다.
하지만 여러 개의 팽이가 각자의 손잡이에 맞게 우측 또는 좌측으로 돌고 있는 마당에서는 갈등이 없다. 갈등의 원인에는 항상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상과 이념 때문에 발생되어 왔다. 우익 일변도도 문제지만 좌편향적인 극단적 선택도 갈등을 부추키는 요인이 된다.
생각의 차이를 이념의 차이로 몰아세우는 색깔론은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주요 갈등이다.
좌파와 우파, 나 아니면 너, 남자와 여자, 강남과 강북, 자본과 노동, 세대간의 갈등이 생긴 원인이 무엇일까? 우리나라 문단의 대표적인 갈등은 황석영과 이문열로 대립되어 왔다. 살아 온 방식과 경험이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의 갈등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에 익숙한 한국사회를 대변하고 있다.
시인 황지우는 '버스기사가 우측으로 갑자기 몰면 사람들은 좌측으로 쏠린다' 라고 하였다. 몇 해 전 작고한 이영희 선생의 담론집에서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며 힘의 균형을 이야기 했다. 극단적인 선택에 있어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가 당연시 되어버렸다. 교량역할을 하는 중간은 회색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한다.
과연 좌파와 우파의 정의가 실체적인 존재일까? 한 쪽이 승리한다면 다른 한 쪽은 영원한 패배자로 완전히 사라질까? 해답은 이미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선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에서 승리한 동인에서 북인과 남인으로 갈리고 북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북인은 대북과 소북, 또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끝없이 소멸과 생성을 되풀이 하고 있다.
소모적인 싸움에서 벗어나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지혜는 요원한 것일까? 접점의 끝을 모르고 원수 쳐다보듯 하는 싸움에 대처하는 방법과 지혜가 필요하다.
어느 사회나 좌파와 우파는 존재하게 마련이고 또 존재할 가치와 필요가 있다고 서로 인정을 좀 하자. 소통을 중시하고 필요로 하는 합리적인 우파와 좌파는 오히려 나라가 건강하다는 근거이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우파와 좌파가 함께 손잡고 가야 할 상대적인 존재이고 집단속에는 회색주의자도 있기 마련이다.
새가 날기 위해서는 좌우의 날개가 다 필요하다는 점을 모두가 인정했으면 한다. 지금도 세상은 내게 질문한다. 당신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참 쓸쓸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