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훔쳐 본 댓가로 네 목숨을 내 놓던지, 너로 하여금 나를 보게 한 왕을 죽이고 네가 왕이 되어 나를 취하던지 하라.”
결국 왕을 죽이게 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때 왕비의 벗을 몸을 두고 누드라고 하지 않는다. 마치 열대 아프리카 지방의 원주민 중에 옷을 입지 않고 사는 부족을 일컬어 누드족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체는 벗은 몸을 일컫지만, 같은 벗은 몸이라도 미적(美的)대상으로의 육체 곧, 작품화된 나체는 ‘누드’라 한다. 따라서 나체생활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도락적인 쾌감을 위해 벗는 사람들, 그리고 탈사회적 일탈을 추구하는 히피족의 벗은 몸은 누드가 아니라 나체주의자로 규정한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현대에는 누드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나 사진이 산업화되고 있는 추세다. 벗은 몸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관음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여자가 옷을 벗어버리면 부끄러운 마음까지도 벗어버리고 만다.”고 했다. 유주현(柳周鉉)은 그의 소설 ‘육인공화국(六人共和國)’에서 “자아, 벗자! 껍데기는 벗는 거다. 탈피(脫皮)는 성장의 과정이다. 벗은 자 앞에서 입은 자는 교만이며, 위선이며, 동시에 수치다.”고 부르짖는다.
요즘 사람들은 그냥 벗는 자체에 의미를 둔다. ‘벗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건강을 위해서 벗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으로도 벗고, 시위하면서도 강력한 표현의 하나로 벗는다.
2017년부터 강원도 동해안에 누드해변을 조성할 것이라고 한다. 지난 2005년에도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시기상조라는 지적과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