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 보따리 마치 영 못 먹고 못 사는 나라에 있는 딸네 집에 가듯 고구마 한 망, 찹쌀 한 보따리, 김치 한 통, 밑반찬 몇 통 등 먹을거리가 전부다. 누가 보면 먹을거리를 장만할만한 변변한 구멍가게조차도 없는 동네에 딸이 사는 줄 알 것이다,
아니 어머니, 우리 집에 무슨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슨 먹을거리만 이렇게 잔뜩 싸 오시냐 해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먹을거리 아니냐며 들은 척도 안하시고 묵묵히 고구마 망태기를 차에 실으신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어머니는 좀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며 집에 다녀오신단다. 그래서 다녀오시라 했더니, 이번에 어머니가 집에서 가져온 품목은 좀 더 다양하고 심도 있는 것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간절히 필요하다고 하신 것은 바로 곡식들이었다. 콩·팥·조·누룽지 등등. 세상에 우리 집이 무슨 시골 깡촌에 있어 곡식을 사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걸어서 10분이면 대형마트가 365일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리고 얼마나 계실 것이라고 그렇게 곡식을 잔뜩 챙겨들고 오시냐 했더니 습관이란다. 곁에 곡식이 없으면 불안하고 뭔가 서운해서 먹든 안 먹던 곡식이 옆에 있어야 하시겠단다.
한 순간에 이해가 되었다. 어머니 어린 시절 6.25 전쟁으로 인해 거제도에 고현 포로수용소가 들어서고 그로인해 주민 소개령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네로 가게 되었고 먹을 것이 없어 나무껍질을 삶아 먹고 풀뿌리를 캐먹던 그 시절의 두려움과 고통이 마음깊이 남아 60년이 지난 지금도 곡식을 보면 어딘가 보이는데 챙겨 놔야 마음이 편하신 것이다. 이 몸에 밴 어린 시절의 고통에 대한 무의식적 대비는 어쩔 수가 없다.
어머니, 이제는 언제든지 마트에 가면 쌀과 보리가 그득하고 엄니 원하는 것은 언제든 무엇이든 주문해드릴 수 있다 해도 일단은 눈앞에 뭔가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단다. 나는 그렇게 배를 곯는 어려운 시절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몸에 밴 어린 시절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알기 때문에 어머니의 곡식에 대한 집착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을 생각한다. 학교 급식을 하고 나면 음식물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특히 나물반찬이나 아이들이 싫어하는 반찬이 나올 때면 잔반양이 장난이 아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유 급식이 나올 때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면 아이들이 먹지 않고 여기저기 버린 우유가 여러 개다.
그것도 고이 놔두면 좋을 것이나 먹지도 않는 우유를 발로 밟아서 터뜨려 놓는 녀석들도 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았는가. 같은 동네 사는 딸네 집에 오는데도 곡식을 종류별로 바리바리 싸오고 쌀 한 톨이라도 애지중지 하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주는 음식 먹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애들이 허다하다.
정말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먹는 것 걱정안하고 잘 살게 되었는가. 살만해졌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시 그 나무뿌리 캐먹던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먹는 것 준비를 최선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목숨을 거는 날이 곧 올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방만히 살아가고 우리 자녀에게 생선 잡는 법이 아니라 생선을 잡아서 바친다면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은 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뭐가 있는가. 땅이 넓은가, 자원이 많은가, 많은 것이 있다면 면적대비 인구가 많은 것뿐이다. 그런데 너도나도 복지를 외치고 정치인들은 마치 경쟁이나 하듯 선심 공약을 내세워 예산을 늘리고, 내 밥 그릇 키우고 개수 늘리기에 열을 올려 나라야 어찌되던 말든 나는 나의 입지를 굳히겠다고 머리띠를 두르는 순간 우리는 그날을 하루씩 하루씩 앞당기고 내 자녀의 삶을 더 궁핍하게 조우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배곯지 않고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인 곡물들을 생산하기까지 풀뿌리를 삶아먹고 허리띠를 졸라맨 우리들 부모의 희생과 수고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런 부를 자손대대로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우리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나는 떠나기 전에 희생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가르쳐서 먹고 살 걱정을 안 하게 해주신 우리 어머니에게 곡식이나 한 가마니 사 드리고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