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비결, 평생 병원 간 적 없고 고기·채소 등 음식 가리지 않아

"옛날 설의 풍속과 요즘의 설의 풍속을 비교하면 너무나 많이 변했다. 요즘의 설은 그저 예의상 행하는 하나의 행사지만 옛날에 설은 절대적인 행사의 하나였지."
지난 17일 거제면 옥산마을에서 만난 강봉조(103) 할머니는 정말 103살인가 싶을 정도로 정정했다. 동석한 며느리 원신수(77) 씨에 따르면 "할머니는 평생 병원에 간 적이 없고 요즘도 고기든 채소든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고 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 가장자리 소파에 반듯이 누워 있던 할머니는 기자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는 청력이 떨어져 잘 듣지 못하는 탓에 며느리가 목소리를 높여 되묻곤 했다.
이내 일제강점기 시절 설날 차례를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할머니는 "일본 사람들이 양력설을 지내라고 강요하며 공공연히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했고 설날 아침에 떡국을 끓였는지 밥을 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솥을 검사하고 다녀서 설날 새벽 일찍 차례를 지낸 뒤 다시 밥을 해놓기도 하면서 음력설을 지냈다"고 회상했다.
6·25 전쟁 때에는 "이곳 옥산마을에도 피난민들이 아주 많이 왔다. 설날 아침에 우리 식구들이 차례를 지내면 집 근처 피난민들이 대문 밖 길에 모여서 함께 차례를 지내고 우는 모습을 봤다"고 눈시울을 적시며 말했다.

설날 음식은 오랜 시간 준비했다는 할머니는 "음력 12월이 되면 설날 준비를 시작했다. 적당한 날을 받아 엿 달이기, 강정·유과·약과를 만들었는데 만드는 과정이 간단치 않아 최소한 2~3일 동안 친척들이 함께 만드는 예가 허다했다. 그리고 미리 술도 빚어 청주(淸酒)를 떠서 잘 보관했다. 설 2~3일 전이 되면 가래떡을 만들어서 광의 서늘한 곳에 보관했다. 보관된 가래떡은 적당히 마르면 떡국용으로 썰었다. 지금은 기계로 썰지만 그 때는 전부 손으로 썰었다. 이때는 남자들도 여자들을 도와주었고 떡을 써는 일이 만만치 않아 손이 부르트는 일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할머니는 "남녀노소 모두가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설빔으로 갈아입고 차례를 지내는데 아이들은 새 옷을 기대하며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운동화·고무신·양말·버선 한 켤레 정도는 갈아 신겨야 했기 때문에 설날이 다가오면 걱정부터 앞섰다"고 말했다.
웃어른께 세배하는 풍속에 대해 할머니는 "마을 모든 사람들이 대소가의 어른과 마을의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다녔다. 마을 전체가 세배 길에 나섬으로서 마을의 골목은 사람으로 넘쳐났다"면서 "세배가 끝나면 떡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성묘를 다녀온다. 가까운 묘소는 설날 할 수 있지만 먼 곳은 날짜를 잡아 대소가 식구들이 같이 성묘를 다녔다. 어린 아이들도 이들의 행사에 참여 했기에 상당히 힘들어 했다"고 추억했다.
설날에 즐겨하던 놀이를 묻자 할머니는 "설날 저녁에는 가족들과 윷놀이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윷놀이보다 화투놀이를 더 많이 하더라. 여자들은 널뛰기도 했고, 남자 아이들은 제기차기와 구슬치기 등의 놀이를 했지만 요즘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초에는 새해 신수를 보는 토정비결이나 무당의 신수점을 보기도 했다는 할머니는 "설날의 차례·성묘는 미풍양속으로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어서 좋은데, 동네 웃어른께 세배를 다니는 일은 예전에 비해 찾아보기 어렵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