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안개가 수은등을 감싸고 내리는 깊은 밤, 너를 생각하며…"로 시작되는 그녀가 사는 동네가 궁금해 몰래 가본적도 있었다. 그녀가 사는 밤의 풍경은 큰 강을 앞에 두고 있는 논길 사이로 드문드문 이어진 가로등을 물안개가 꽤나 괴롭히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녀의 창에서 바라보이는 강에서 피어나던 밤안개 이야기는 이후 계속된 편지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여인숙까지 갖춘 동네에 살았던 그녀와, 외진 산골 동네에 살았던 나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밤은 공평하게 등장하였지만, 늘 그 시간은 안타까웠고 짧았다.
편지는 힘든 노동을 한 뒤에 찾아오는 피로감을 잊게 하는 최고의 처방이 되어 주었다. 농사일을 돕다가 언덕에 잠시 쉴 때 모든 나뭇가지의 잎이 내겐 꽃이 되었고, 산에 핀 아카시아 향기가 마을로 습격하는 밤이면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가슴을 헤집고 밀려오는 향기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오는 일주일 동안이 설레면서도 기다리기 힘들었다. 너무 쉽게 써 버린 듯한 "보고 싶다"는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그랬고, 그녀의 대답이 궁금하여 또 그랬다. 몇 번이고 읽어도 마음이 촉촉해지는 후리지아와 아카시아 향기로 기억되는 첫사랑의 편지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막걸리 향이 난다. 한글을 읽고 쓰시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도시로 간 형이나 누나의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을 쓰는 일은 내 차지였다. 편지가 도착하면 으레 아버지는 술심부름을 시키셨다.
한 손에는 누런 막걸리가 출렁이는 4홉들이 병 밑동을 받치고 주둥이는 겨드랑이에 틀어쥐고서 박새 뛰노는 보리밭 길을 쉼도 없이 뛰었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보리밭 논두렁 길 사이로 하얀 찔레꽃이 수줍게 바람을 타고 있었고 수꿩의 검붉은 머리가 보일 듯 말 듯 보리밭 속을 헤집고 다녔다.
취기가 오르신 아버지는 기어코 내게 편지를 내밀면서 읽어라 하셨다. 차라리 술심부름에서 돌아오지 말까하는 생각까지 드는 곤혹스런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 전상서 불효자식 자주 찾아뵙지 못해…"로 시작되는 누나나 큰 형이 보내준 편지를 아버지께 읽어 주며 슬프고 아픈 곤혹감을 잊기 위해 과자 봉지를 시끄럽게 뜯기도 하였다.
"아버지 다시 찾아뵙는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라는 마지막 부분을 채 읽기도 전에 당신은 크응, 크응거리며 내게 등을 보이고 막걸리가 비어가는 빈 병을 거친 손가락으로 긋고 계셨다.
텃밭에 기른 파를 고르던 어머니는 "또 저런다, 누가 죽기라도 했소?" 한마디 던지시고는 삭정이를 소리내어 부러뜨리며 불을 지폈다.
나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배경이 되는 편지에서는 보리밭 논두렁길에 핀 찔레꽃잎이 마구 흔들리는 막걸리 향이 난다.
언제부터인지 손으로 쓰여진 편지가 사라졌다. 우편함 가득 쌓이는 청구서와 홍보용 전단지는 차라리 공해다. 손으로 쓴 편지에는 보낸 사람의 향기가 있어 좋다. 편지 속에는 그리움과 사랑이 있고, 기쁨과 눈물도 있지만 그 사람의 향기와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으로 편지를 쓰고 또 받고 싶어진다. 언제 닿을지 모르는 희미한 기다림 사이로 편지보다 먼저 도착하는 향기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
편지를 쓰는 동안 그 사람의 향기에 취하고, 그리하여 쉽게 지울 수 없고 지워도 흔적이 남는, 꼭 그 사람을 닮은 꽃의 향기가 있는 편지를 받고 싶다.
지난 날 퇴색하고 묻혀버린 기억 속에 향기를 파내는 일은 홀홀히 다룰 것은 아니지만, 편지를 쓰고 받던 그 날의 청순을 오롯이 되살릴 수 있음이란, 메마른 마음속에 맑은 바람과 시원한 물줄기를 다시 흐르게 할 것이다.
이제 곧 봄이다. 그런데도 세상의 사람들이 피어 날 꽃처럼 환하지 못하고 지쳐 보인다. 사랑하거나 그립지 않은 사람이라도 좋으니 편지를 써 보자.
그리하여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빈 마음 긁는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개학이다, 입학이다 하여 없는 돈 챙기기 바쁜 피곤한 우리 부모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일이라면 다행한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