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배우는 거제역사3]역사적 인물이 터 잡았던 땅
[신문으로 배우는 거제역사3]역사적 인물이 터 잡았던 땅
  • 거제신문
  • 승인 201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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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기부터는 나라의 이름 있는 인물들이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거제도에 내려와 살게 되었습니다.

고려 의종임금 때 학자 정서는 의종이 왕이 되기 전에 의종의 아우를 왕으로 삼으려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의종 5년(1151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의종 12년(1158년) 거제도로 유배되어 12년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때 의종은 머지않아 정서를 다시 부르겠다던 약속을 믿고 기다린 것이 꼬박 20년이나 됩니다.

정서가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의종은 "오늘은 어쩔 수 없으나, 가 있으면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으므로, 정서는 의종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자신의 결백을 거문고 가락에 얹어 노래에 담았습니다. 정서는 호를 과정(瓜亭)이라 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곡'이라 불렀고, 지금 전해지는 국문 고려가요로는 유일하게 작가를 알 수 있는 작품입니다.

내가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지내니
산에서 우는 소쩍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저의 죄는 사실이 아니며 거짓일 줄을
지는 달과 새벽별은 알 것입니다.
넋이라도 임과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

고려 의종 때 학문을 닦는 신하들이 군인들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고 왕을 거제섬으로 귀양 보내게 됩니다. 의종임금은 통영에서 견내량(사등면 오량리 앞 좁은 바닷길)을 건너와 지금의 둔덕면 거림리의 우두봉 중턱에 성을 쌓고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3년 동안 머물다가 계림(지금의 경주)로 옮겨갔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의종이 머물렀던 성을 기성(岐城 : 폐왕성 또는 피왕성)이라고 부릅니다.

조선 숙종임금 때 송시열이라는 이름난 벼슬아치도 당파싸움으로 말미암아 거제도로 귀양 오게 되었습니다. 당파싸움이란 신하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억울한 마음을 꾹 참으며 터벅터벅 낯선 땅에 왔지만 거제도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곧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알아줄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의 거제면에 가면 반곡서원이 있는데 거기에 아직도 송시열 선생님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 숙종임금 때 학자 김창집은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습니다. 이분은 증조부가 좌의정, 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대단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숙종임금이 돌아가시자 왕위계승 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다투다가 거제도로 귀양 오게 되었고 얼마 후 끝내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거제면 반곡서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밖에도 거제는 이름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귀양 와서 살게 되면서 좋은 문화의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그 문화의 씨는 거제의 문화와 예술로 꽃 피워져 빛나게 될 것입니다. 

정리 : 윤일광 논설위원(자료제공 : 거제교육지원청 '거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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