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를 빼앗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황금어장인 거제의 바다는 모두 일본인들이 주인 노릇을 했습니다. 어민들 뿐 아니라 농민들도 이런저런 핑계로 농토를 빼앗겼지만 나라 없는 백성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었습니다.
1919년 4월 3일
우리 고장 거제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함성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3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맞추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거제 출신 이공수, 윤택근, 이주근, 이주무, 이인수, 윤사인, 주종찬 등이 주동이 됩니다. 이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몰래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지금 대우조선이 있는 자리인 아양리 바닷가 당등산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아주 장터로 향했습니다. 그날이 아주 장날이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본 헌병이 달려와 총을 쏘며 해산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난 군중에 놀란 헌병대가 때마침 내린 소나기를 핑계로 철수하면서 별다른 피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주종찬과 천주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2차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지금의 옥포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망덕봉에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아주 장터로 향했습니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힘차게 행진했습니다.
“침략자 일본은 물러가라.”
“친일파 매국노들은 각성하라.”
거제도의 하늘 높이 독립의 기운이 메아리치자 이를 본 주민들과 시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목이 터지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아양리에 사는 한 청년은 결혼식을 하려 가던 중이엇는데도 말에서 내려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고기를 잡던 사람들도 그물을 내던지고 달려와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일본 경찰과 헌병이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동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주종찬과 윤택근은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에도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여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재판장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였음과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넘치는 애국심에 재판장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일본 판사가 주종찬에게 또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고 묻자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일심(一心)’이라는 혈서를 써서 판사에게 던졌습니다. 오직 독립운동을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 만세운동 이후 이운청년회(옛날 고현면이 일운면과 이운면으로 나누어졌고 일운면은 다시 신현면과 일운면으로 나누어지고, 이운면은 장승포시가 된다.)를 중심으로 각 면마다 청년회가 결성되었으며, 청소년과 장정들을 위한 야학회와 노동자, 어민들이 결성한 각종 단체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계속됩니다. 청년들과 어민들이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리 : 윤일광 논설위원(자료: 거제교육지원청 ‘거제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