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북한군이 갑자기 침략을 감행했기 때문에 우리 국군은 막아낼 틈이 없었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 후퇴를 거듭하면서 온 나라가 공산군의 손에 함락 당할 정도로 위험에 빠졌습니다.
창원·고성·통영까지도 공산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제는 섬이라는 조건 때문에 안전했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거제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거제인구가 12만 명이었다니 엄청난 숫자입니다.
다행이 유엔에서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16개국이 모여 유엔군을 조직했고, 1950년 9월15일에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공산군이 도망갈 길목을 막아버렸습니다. 마침내 잃었던 서울을 도로 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이제 통일을 눈앞에 두는가 싶었는데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쳐들어오면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두고 1·4후퇴라고 합니다.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3000명의 포로를 수용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여성포로가 30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은 인민군 반공포로·인민군 친공포로·중공군 포로·여자포로·남한출신 의용군 등의 5개 모둠으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수용소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포로수용소에는 한 천막에 60명씩 생활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철조망뿐이었기 때문에 포로들끼리 쉽게 왕래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밤이 되면 유엔군 감시병이 수용소 안에 근무하지 않아 포로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설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포로들끼리 싸움이 잦았고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포로들 중에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포로와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공산포로, 이렇게 두 편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반공포로의 수가 늘어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공산포로들이 수차례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고, 1952년 5월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던 돗드 준장을 납치하여 감금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그 뒤 남한과 북한은 보호하고 있던 포로들을 서로 바꾸기로 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포로교환에 앞서 2만7389명의 반공포로들을 정의롭게 석방하여 새 삶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수용소의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전쟁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조성하여 1999년 10월15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개관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이나 모습·의복·무기 등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변했습니다.
정리: 윤일광 논설위원(자료: 거제교육지원청 '거제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