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촌을 지나며
해량촌을 지나며
  • 거제신문
  • 승인 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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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사람을 막는다 -

강남주
《시문학》 천료.
 부경대학교 총장 역임,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 역임

누님 사는 동네 복판으로
새 길 뻥 뚫렸다.
호리 휜 매형 밭에 갈 때
자전거 타고 갈 수 있다고
머리 센 누님 기분 좋고 좋았다.
까만 아스팔트 새 길 위로
총알택시까지 까불며
언제나 아무나 앞질러 달렸다.
자전거 타고 밭에 가던
매형의 즐거움도
앞지르는 택시에 당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숨이 멎은 그 길에서
매형 자전거는 사라져버렸고
누님의 눈물은 흥건했다.
총알만 밤낮으로 날아다녔다.

·시 읽기: 계간 《문장21》 5호(2009, 여름)에 실린 시이다. 시인이 친인척을 시 속에 끌어들이는 시적 구조는 실존의 인물이 아닌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허구의 인물을 창조해 내는 시적 허구의 상상력은 허구적 진실성에 신뢰감을 더해 주기도 한다. '길'이란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성과 우의성을 지닌다. 이 시에서 새 길의 상징은 희망과 절망(죽음)으로 양립한다. 새 길(희망)이 곧 슬픔과 절망으로 전이되는 경험적 상징이기도 하다. 그 새 길 위에 총알만 밤낮으로 날아다녔다며 시인은 제발 제한 속도(개발의 속도, 차량의 속도, 삶의 속도)를 지키자고 말하고 싶어 한다.
 시인은 아스팔트 새 길을, 죽음을 앞당기는 길, 총알택시가 광기를 부리는 길, 숨 멎은 그 길 등 문명 비판적 풍자를 하고 있다. 사물의 내면에 숨어 있는 세계를 읽어 내어 그 희로애락의 의미를 형상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결과일 것이다. 이 시대에 만연한 개발 지상주의와 속도 지상주의를 경계하고, 현대 메커니즘 욕망의 산물인 아스팔트 도로의 또 다른 모습과 표정에 시선을 멈추고, 그 길의 안과 밖을 심미적으로 인식해 허구적 슬픔으로 육화한 것이다. 그러면서 생명 존중과 생태 보존의 시 정신을 모색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 문명의 광기와 폭주성 · 폭력성 · 폭발성을 만천하에 고발하는 치열성은 진정한 생명 존엄성을 중시하는 올곧은 시 정신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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