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가 뒤집혀 거의 다 가라앉아 가는데도 선장은 어떤 조치도, 대피하라는 선내방송도 하지않고 승객들을 향해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방송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는 구조정을 타고 다른 조난자들과 함께 배를 떠났다. 선장이 떠난 침몰선 안에는 475명의 인명이 물속에 남아 있었다.
세월호 승객 대부분은 서울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10개 반 남녀학생들이었다. 이제 막 20살 안팎의 꽃송이들은 출항한 뒤 10시간 후 한꺼번에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孟骨水道)에 잠긴 채 소식이 없다. 이날 새벽아침시간만 해도 밝은 미소로 다독이던 효심과 우정들이었다.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 세월호는 청해진해운 소속 배다. 1994년 일본이 건조해 현지에서 18년 동안 사용한 배를 도입해 선미부분을 일부 증축 및 개조한 6,825톤급 배로 921명의 승선인원 및 차량 180대, 콘테이너 152기 등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크루즈여객선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청해진해운은 매출액 320억에 영업손실 7억9천만 원으로 어려운 경영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열악한 여건에서도 소속 산하 직원의 평소 직무수행 매뉴얼의 완벽한 수행능력은 습관화 돼 있어야 했다.
인천을 떠나 제주도를 향하던 이날 세월호의 조타(운전)는 3급 항해사였고 선장은 자리에서 없었다. 3급 조타수의 미숙한 운전과 많은 짐을 실은 배를 급선회하면서 무게 중심이 무너졌고 거기에 거센 유속까지 겹쳐 배는 중심을 잃었다. 둔중하고 큰 짐 뭉치와 컨테이너 쇠 박스 등의 고정장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짐들이 쏠리면서 선벽에 부딪히는 쾅! 쾅! 소리가 선실까지 들렸다고 한다.
세월호가 가차도와 맹골도 사이의 물목 해역을 통과하며 처음 배가 기우는 징후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침몰하기까지의 급박한 시간은 그나마 80여분, 거의 1시간 반 가량의 기적 같은 시간이 있었으나 선장은 수백 명의 목숨을 버려둔 채 맨 먼저 구조선에 올라탔다.
우리는 세월호 선장의 무책임한 태도에서 분노와 환멸, 그리고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이미 구속이 된 선장은 물론 국민에 대한 죄송한 말끝에 미처 구조선이 오지 안 해서 방송을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영화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아니더라도 선장과 선원은 그 어떤 어려운 조난 사고에서도 승선인을 먼저 구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비록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살신성인의 몫을 다 해야 한다.
선장이 도리와 임무를 다해주었더라면 어쩌면 모두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선장이 아닌 여승무원 박지영(23)은 끝까지 남아서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있었다. 침몰선의 브리지에 매달려 그나마 입었던 구명조끼를 벗에게 벗어주고 선실에 잠긴 많은 친구들을 살리기 위하여 뒤돌아 뛰어든 단원고(2학년4반) 정차웅 검도학생. 선장의 지시를 기다린다는 것은 특히 조난선의 위기에서는 절대적인 수칙이다.
이런 면에서 학생들은 모두 물이 숨을 막아도 어른들(선장)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안내방송 그대로 부동의 자세를 견지하려고 선실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어찌 믿고 따르겠는가? 여기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기목숨을 돌보지 않은 선원 박지원(22)양은 물이 드는 배 칸에 서서 구명조끼를 학생들에게 챙겨주며 왜 언니는 입지 않느냐고 하자 선원은 맨 나중이라고 답했다.
또 목숨을 잃은 단원고 남윤철(35남), 최혜정(25여)교사를 비롯한 교사들은 학생들을 먼저 구하느라 끝내 자기들 생명을 돌보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조난선 세월호의 선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위기의식 관리에 계층과 위신이 따로 없다. 목숨을 아끼는 것이 위기의식의 실체가 아니다. 매사에 생명을 돌보듯 자기가 맡은 일에 진실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한결같이 평소에 수련이 되어 습관화가 되어야 한다. 안전불감증으로 인격적 처신을 하지 못하는 국민은 아무리 경제가 발달해도 결코 복지국가 내지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부터 이런 반성과 참회를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