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는 성경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 성경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함께 있기를 비는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는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서 은혜가 중요하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설 수 없다. 은혜가 아니면 천국 백성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부를 수도 없다.
은혜가 이렇게 중요하기에 사도 요한은 성경의 제일 마지막장 마지막 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각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언제나 은혜에서 시작해서 은혜로 끝맺고 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많을지어다"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성도의 삶에서 은혜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은혜가 무엇인가? 은혜는 '카리스(καριιc)'라는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말로,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호의 친절 등을 뜻한다. 하나님은 값없이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 중에 하나가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용서하신 일이다. 이 강도는 앞으로 성경을 공부할 것도 아니었다. 회당이나 교회에 나갈 것도 아니고, 자기가 피해를 입힌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죄를 빌며 용서를 구할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말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강도를 향하여 뭐라고 선포하시는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이 은혜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 받고 있는 강도를 향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고 선포하시는 것은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착하게 살아야 한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선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도가 착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착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착하게 살아야 천국 간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형틀에 매여 죽어가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주소서' 하는 한 강도를 구원해 주셨다. 그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장기를 기증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사형틀에 달려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무슨 착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에게 천국을 약속해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고 물어보면 착한 일을 해야한다. 교회에 잘 다녀야 한다. 악한 마음을 먹지말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값없이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너희 돈 없는 자도 오라고 하셨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다. 포도주와 젖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값없이 돈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라는 것이다.
범죄한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설 수 있을까? 어찌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오직 은혜뿐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고 오직 은혜로 구원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