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성 애
모 성 애
  • 거제신문
  • 승인 2007.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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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혜 계룡수필 회원

식구가 늘었다. 갑자기 집안이 부산하다. 우리 부부와 ‘소동’이 이렇게 셋이 살던 집인데, 지난주에 ‘소동’이가 새끼를 여덟이나 낳았다.

우리 집에 올 때만 해도 별로 배가 부르지 않았었다. 원주인이 몸에 새끼를 가졌다고 들려주었지만, 그리 흔적은 없었다. 몇 주가 지나면서 완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유두가 눈에 띠게 커지고 배도 많이 불러왔다.

움직이는 행동도 민첩하지 못하고 둔했다. 축 널브러져 씩씩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임산부의 모습이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기일을 채우고 ‘소동’이는 엊그제 여덟이나 새끼를 낳았다.

처음에는 몇을 낳았는지 알 수 없었다. 출산을 하며 산통을 호소해 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는데다가 나 역시 새끼를 받아본 경험이 없기에 그냥 출구를 덮어만 주었다.

한 나절의 긴 산고를 지켜보며 갖은 애를 태웠다. 오후가 되어서야 ‘소동’이의 산고는 멈추었다. 궁금하여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슬이 시퍼렇게 경계하는 모습에 나는 이미 질려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개집을 살펴보고 여덟 마리나 낳았다고 한다. 남편의 접근을 허용한 뒤로 우리 부부에게는 경계의 눈을 늦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접근은 선택적이었다. 나름대로 가리는 법이 있는가 보다.
집에 들른 사람마다 많이도 낳았다며 다 키울지 걱정이란다. 제 몸에 맞게 댓 마리 낳았으면 좋으련만, 많은 새끼를 낳았으니 얼마나 어렵겠냐며 사람이 쌍둥이를 낳았을 때처럼 걱정이다.

사실 우리도 걱정이다. 어찌 키울지, 옆에서 우유라도 먹여주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직은 새끼를 손대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니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겨우 하는 것이 아침에 기상과 동시에 개집으로 가서 밤사이 안녕을 묻는 것이다.

참으로 귀엽다. 새끼도 귀엽지만, 어미 또한 귀엽다. 그 많은 새끼를 골고루 잘도 보살핀다.
사람이 접근하면 어미가 앞으로 와서 새끼들을 감추고, 멀어져 가는 놈은 제 입으로 살짝 물어서 품으로 안아 들인다.

새끼의 변은 깨끗하게 혀로 핥아먹는다. 그것을 바라보며 신비롭다는 생각이 든다. 제 새끼를 저리도 깔끔히 관리하며 키우다니 ‘소동’이가 다시 보인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제 혼자서 출산을 하고, 저리도 능숙하게 육아를 감내하다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개가 어찌 보면 사람보다도 낫다는 생각이 든다. 육아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제 자식을 유기하고, 생활고의 어려움을 핑계로 제 자식을 버리는 인간들의 모습.

또 그 아이들을 외국으로 입양이나 하고 있는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이 ‘소동’이 앞에서 부끄럽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혈육의 피가 별거 아니란 생각이 눅눅히 번져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자식을 즐거운 삶의 장애물로 인식하여 결혼을 아예 거부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피임으로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몰인정이 ‘소동’이 앞에서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어쩌다 임신이 되어도 아이는 한순간 쾌락의 산물로만 여겨 책임도 느끼지 않고 임신중절을 하는 오늘의 세태가 인간들의 자화상이 된 지 오래다.

오늘도 내 일과의 반을 ‘소동’이와 지냈다. 곰실거리며 제 어미를 찾아 옹알이도 하는 새끼들이 마냥 귀엽다.

제 가슴을 풀어헤치고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소동’이를 바라보는 것은 나의 즐거움이다.
오늘도 ‘소동’이가 찐한 그 무엇을 내게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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