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의 질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선교를 하느냐가 아니었다. 믿을 때에 제자훈련을 받느냐도 아니고 새벽기도를 하느냐도 아니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 받는 것이 믿음의 가장 기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다. 또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실 때 그 현장에서 기적을 직접 보았고 또 체험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 뿔뿔이 도망갔다. 베드로는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그들은 두려워서 방문 꼭꼭 걸어잠그고 숨어있었다. 왜 그런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고 능력이 임하지 않아 그와 같은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고 난 이후에 이들은 완전히 변화되었다. 두려워 떨며 숨어 있던 자들이 문을 박차고 나가 복음을 전할 때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와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말씀하였던 그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에 그들이 능력을 받았던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령 받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으며, 또 누구든지 그 안에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미 성령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느냐” 이미 성령 받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다. 성도가 술 취하는 것이 방탕한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이 또한 성도의 방탕함이라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고 또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모습이 기쁨 충만이다. 감사 충만이다. 찬양이 넘친다. 예배드리는 것이 좋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좋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성도에게는 항상 “감사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렘 30:19)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면 기쁨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진다. 아무 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속상해하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온다. 성령 충만하면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되지만,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이 모든 복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 앞에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한다. 어찌 보면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려면 지금 나의 영적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계속 받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도들은 지금 여기서 성령 충만을 받고 살아야 한다. 어제가 아니다. 한 달 전이나 일 년 전이 아니다. 처음 믿을 때도 아니다. 지금 여기서 성령 충만을 받고 살아야 한다.
당신은 “믿을 때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는가? 지금 여기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