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시구를 밤낮으로 하루 2번씩 고시원 천장을 바라보며 암송하기를 1년이 흘렀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도 울어대던 소쩍새의 심정을 조금씩 이해할 때쯤 꿈에서나 바랬던 최종합격의 소식을 집에서 통보받고 어머니와 부둥켜 안은 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경찰이라는 단어를 되뇌기 시작한 건 연필을 잡기 이전의 일이다. 마치 운명처럼 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주위의 하릴없는 권유였는지 모르겠으나 어느새 경찰은 내 인생의 전면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나의 활달한 성격과 어릴 때부터 거무튀튀한 피부가 주위분들의 판단에 큰 몫을 하였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실 해양경찰을 제대로 알게 된 시기는 대학을 입학한 이후였다. 부산에 위치한 한국해양대학교 해양경찰학과에 입문하고서부터 해양경찰에 대한 매력을 차츰 느끼게 되었으며, 언제부턴가 향후 나의 진로는 바다로 향하게 되었다.
병무청 신체검사시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학교 특성상 군특례가 인정되어 졸업과 동시에 상선근무를 하게 되었으며, 5대양을 주름 잡으며 보냈던 3년의 세월은 바다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을 선물해 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양경찰이 되기 위한 소양을 꾸준히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군특례를 마친 뒤 그동안 품었던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알 수 없는 묘한 기대감을 안고서 신림동 고시촌의 문을 두드렸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발을 들여 놓을 때 느끼는 어색함과 두려움은 여느 때보다 더했으며 그 아득한 느낌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막연함의 적막을 깨고 보무도 당당히 해양경찰간부후보생으로서 1년간의 경찰종합학교 교육에 임하였다.
다소 지루했던 교육기간을 무사히 수료하고 4월12일자로 통영에 발령이 났다. 충무공의 얼이 서린 한산섬을 바라보고 있는 통영해양경찰서야말로 나의 첫 번째 무대로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엄숙했던 보직신고가 무색하리 만큼 경비함 전용부두에서는 훈련이 한창이였다. 동방의 나폴리라 불리우는 통영항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둘째 날부터 훈련에 합류하였다. 물론 별다른 임무가 주어진 것은 아니였으나 지휘관의 마인드를 가지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훈련의 세부진행사항을 눈여겨 보았다.
나흘간 대원들은 훌륭히 훈련에 임하였으며, 옆에서 멍하니 지켜본 나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할 정도였다. 그들이 보여준 강인함과 단결력을 첫인상으로 가슴에 품은 채 나의 첫 해상순찰이 시작되었다.
통영해경서의 기함인 277함에서 수행했던 힘든 임무들은 고스란히 내 두 눈과 귀를 거쳐 소중한 경력으로 쌓이고 있었다. 100일이 지나기도 전에 함정근무를 마치고 7월27일자로 거제시 신현읍에 위치한 고현파출소 근무를 명 받았다.
내부규칙상 간부후보생은 2년간 순환보직을 해야 하므로 한 부서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함장님과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 한 채 아침 일찍 새 근무지로 나섰다. 운전하는 내내 해상에서 벌였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를 처음 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새로움과 도전은 매너리즘에 젖어있는 나태한 일상을 타파하고 늘 나를 깨운다. 파출소 직원들과의 어색한 첫 인사를 마치자마자 간밤에 있었던 사건 사고에 대해 전 직원이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이번 파출소 근무는 치안현장의 최일선인 만큼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감지되었다. 단기간 철새처럼 스쳐 지나가며 기존 직원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되기에, 멋모르는 두 눈을 그들과 마주치며 나도 한 몫 하리라 다짐하였다.
7-8월은 하계 특송기간이라 여느때 보다 분주한 모습이였다. 아직은 모든 것이 생소하지만 성실한 모습으로써 그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며 치안의 공백을 메울 것이다.
내 인생의 청사진을 저 푸른 바다 위에 커다란 경비함을 조종하면서 그리려 한다. 그 옛날 신라 문무대왕이 죽어서도 해룡이 되어 동해 바다를 지키려 했듯이, 나의 열정과 노력은 해류를 타고 우리 바다에 고루 내닿아 국민의 안전을 지켜낼 것이다.
다른 어떤 활동보다 꽃을 피울 때 에너지가 가장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 어깨에 무궁화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10년을 갈고 닦았다. 지금 이 꽃잎을 조국의 앞바다에 띄우려 한다. 조국의 바다가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푸르른 웃음으로 화답할 때까지 쉼없이 달릴 것이다.
내가 쉴 곳은 독도 위 어느 후미진 곳에 지어둔 조그마한 초가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