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촌마을 이야기
효촌마을 이야기
  • 거제신문
  • 승인 2014.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제시 연초면 연사리 효촌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효촌마을은 '효자문'으로 불렀던 마을로 연초초등학교에서 맞은편으로 보이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효심이 지극한 이돌대(李乭大)라는 청년이 살았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가운데도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 지극하고 뛰어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 효자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조금도 차도가 없어 애를 태웠습니다.

"내가 노망이 들었나 보구나, 이 엄동설한에 왜 이렇게 숭어가 먹고 싶단 말인가?"

병석에 있는 어머니의 넋두리에 아들은 숭어를 구해 오기 위해서 온 거제도에 있는 바닷가와 시장을 다 돌아다녔지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숭어는 바다의 수온이 낮은 겨울이 되면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숭어를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효자아들은 애를 태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혹시 몰라, 통영에는 고기 거래가 많은 곳이니까 겨울이지만 숭어가 있을지도 몰라."

당시 통영시장은 거제보다 훨씬 컸고 대부분의 고기는 통영시장에서 거래되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고 통영시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겨울숭어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 효자아들은 어깨에 힘이 빠진 채로 거제로 돌아오기 위해 견내량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 당시 거제도는 다리가 없는 섬으로 지금의 사등면 견내량에서 통영과 거제를 오가는 나룻배가 사람과 짐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나룻배가 견내량 바다의 중간쯤 왔을 때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배위로 뛰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건 효자아들이 그렇게나 찾던 숭어였습니다. 효자아들은 너무나 반가워 숭어를 잡으려고 하자 숭어는 다시 바다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들은 뱃전에서 엉엉 울다가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효자는 마침내 그 숭어를 잡아 올라왔습니다.

마침 그 배에는 통영 통제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통제사는 효자의 이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어머니를 위해 추운 바다 속에 뛰어들어 숭어를 잡아오는 광경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허허,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효자로군!"

통제사는 이 효자아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묻어두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동안의 효자에 대한 기록과 겨울에 숭어가 나타나 어머니의 병환을 고치게 되었다는 사연을 자세히 적어 나라에 보고했습니다.

옛날에는 일반백성이라 할지라도 귀감이 되는 일이 있으면 나라에 보고하고 나라에서는 비각을 세워주고 벼슬도 주었습니다. 효자 이돌대는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던 염한(鹽漢)이었지만 이 일로 종9품의 문관직인 장사랑(將仕郞)이라는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효자 이돌대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다가 중종12년(1517년) 10월 6일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올린 장계(狀啓)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중종실록 제30권에 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 숙종임금 때 정려문(旌閭門:충신이나 효자ㆍ열녀의 뜻을 기리어 세우는 비각)이 하청면 사환마을에 세워졌다가 오랜 비바람으로 낡아지자 지금의 효촌마을로 옮겨오면서 '효자문'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때 얻었습니다.

지금 효촌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효자 장사랑 이돌대 유적비'는 2006년 1월에 효자 이돌대의 효성을 자랑스러운 고장정신으로 삼고 그 정신을 본받아 바르게 살아가고자 효촌마을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 세운 비각입니다.              정리: 윤일광 논설위원(자료: 거제교육지원청 '거제의 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