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는 사상이나 이념 이전에 뉴스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뉴스는 사상에 근거를 두지 않고 사실에 근거한다. 기독교는 어느 누구의 사상이기 전에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남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는 처녀에게서 아기가 태어났고, 30여년 후에 그 청년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다가 모함을 받아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여 승천했다. 그 직후 뉴스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위험에 빠져 있을 때는 뉴스를 전하는 메신저가 철학자보다 낫다. 그 메신저가 외모가 초라하든 수려하든, 사투를 쓰든 쓰지 않든, 시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신학자 만 명보다 더 귀중한 존재일 것이다.
사람들은 먼저 뉴스를 원한다. 뉴스 해설자는 그 다음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뉴스 메신저와 해설자 둘 다 필요하다. 때때로 해설을 곁들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뉴스도 있다. 그러나 생명이 경각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처방을 갖고 있다는 뉴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생명과 소망과 영원한 기쁨을 주는 뉴스를 전하는 일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때때로 기독교가 갖고 있는 뉴스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기독교는 뉴스지 사상이나 주장이 아니다. 사상과 주장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뉴스가 먼저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기독교 뉴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지만(롬 3:23, 6:2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딤전 1:15). 그분은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전 15:3). 하나님께서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 죄를 씌우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고후 5:21).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정죄가 없다(롬 8:1). 의인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다(벧전 3:18).
예수님께서는 우주의 주인으로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다시는 죽지 않으며 다시는 죽음이 그분을 지배하지 못한다. 구원받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그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고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다(롬 5: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전 2:9).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의 뉴스를 좋은 소식(Good News)이라고 한다. 이런 메시지가 온갖 박해 속에서도 우상의 나라 로마제국을 휩쓸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뉴스 내용이 너무 좋아 가만히 감춰둘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인류 역사는 외치고 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