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지(斑指·ring)
가락지(斑指·ring)
  • 거제신문
  • 승인 201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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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광 논설위원

가락지는 장식용으로 손가락에 끼는 두 짝으로 이뤄진 고리를 말한다. 양반가에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가문의 전통과 가풍의 징표로 대물림되기도 했고, 시집가는 딸에게 친정집에서 부(富)의 상징인 패물로 보내기도 했다.

가락지는 일상생활에서 착용하기 위한 용도보다는 두툼하게 만들어 집안 행사 때의 치장용으로 쓰거나 오래 간직하는데도 큰 의미를 두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는 가락지 한 짝을 관에 넣고 나머지 한 짝은 옷고름에 달아 혼자된 여인임을 표시했다. 훗날 아내마저 죽어 저승에 갔을 때 서로 짝을 확인할 수 있는 신표로 여겼기 때문이다. '월패(月佩)'는 옷고름에 단 가락지로 아내가 생리 중임을 에둘러 남편에게 알리는 표식이었다.

대부분 기혼여성은 가락지를 미혼여성은 반지를 꼈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반지라는 말이 조선시대에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반지라는 말은 서양의 장신구가 수입되던 1901년 일본상인들이 링(ring)을 지환(指環)이라는 이름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광고를 냈고, 이듬해 1902년 4월 23일 자에는 지환이 아닌 반지(斑指)라고 쓰고 있다.

두 짝인 가락지를 기준으로 외짝이기 때문에 반지(半指)일수도 있지만, 반지(斑指)라는 한자를 씀으로써 '양반가의 지환'이라는 의미를 차용한 판매전략으로 보아진다. 두 짝을 쌍으로 하는 가락지 문화는 중국에도 없는 우리의 특별한 양식으로 혼례를 치른 여자가 음양(陰陽)화합을 뜻하는 가락지를 낌으로 부부는 이성지합(二性之合)임을 드러낸다. 기혼여성 외는 기생들이 치장으로 애용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촉석루에서 왜군이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했던 논개(論介)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 때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있었다.

한 잡지사가 성년식에 참석한 만20세 '새내기 성인'들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1위는 애인의 키스였고 2위는 커플링이었다.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반지를 나누어 갖는 사랑의 표식인 커플링보다는 오히려 '가락지'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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