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구천동목장' 찾아, 부채산의 비밀
조선시대 '구천동목장' 찾아, 부채산의 비밀
  • 거제신문
  • 승인 20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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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 기고가

이덕재 기고가
동부면 구천리 산1번지에는 부채산(407m)이 있다. 부채산은 아래서 보면 산의 형상이지만 올라보면 산이라기보다는 평지에 가깝다.

등산객들이 나무에 표시해 놓은 표지로 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부채산과 선자산 사이 동서남북이 각 300m정도 되는 약 0.1㎢(9만㎡)의 고원 같은 평지가 있다.

구천마을에서는 예부터 이곳을 가매(또는 가마)라 불렀다. 이 마을에서는 모내기가 끝나면 가을의 보리파종 전까지 소를 이곳에 방목하는 농가도 많았다. 소를 올려놓고는 며칠에 한 번 씩 확인만 할 정도로 환경이 좋다고 했다.

선친께서는 1960년대 정부가 추진한 육우 대표사업자로 선정되어 부채산 기슭에서 목장을 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아버지께서는 왜 가매에 목장 터를 잡으셨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른이 되어 살펴보니 가매는 넓은 야생초지, 좋은 물, 서늘한 여름환경으로 목장의 최적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구천마을의 지명 중 수몰된 절골 앞 들판이 '목장들'이었고 구천마을의 들이 '둔들'이었는데 넓지도 않은 들을 왜 목장들이라 불렸으며, 둔들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둔답(둔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거제 고문헌총서'와 '구천동목장'관련 연구 등을 살펴보니 여기에 고려 현종 때부터 19C 말엽까지 중앙정부에서 목장을 설치해 운영했다는 것이었다. 구천동목장은 둘레 길이가 119여 리, 목마가 1000여 필이었으니 그 규모가 꽤 컸다. 둔들이 있던 구천마을에서 가매와 목장들은 약5리 내외로, 둔들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관리하는 사람들의 식량수급이 가능했을 것이고, 양지 바른 구천마을은 그들의 주거지였을 것이다.

특히 구천마을은 1970년대까지 교통의 요충지였고 구천동으로 불렸다.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고 목재나 땔감의 수급도 좋은 편이었다. 또 하나 구천마을이 목장이었을 가능성은 이 마을 주민들 중 이백 년 이상 살아온 집안이 없는 것도 그 하나이다. 가장 많은 성씨인 김해김씨의 경우도 이백 년 전쯤 목장이 없어지고 나서 이주해 왔다.

부채산에 목장이 있었을 것으로 확신하는 것은 이곳에서 마사(馬舍)로 보이는 터를 발견한 것이다. 가로세로 각 약 40m이며 면적은 1500㎡ 쯤 이다. 주변 보다 0.5m 정도 높게 석축으로 경계가 지어져 집터였을 것으로 보였다. 규모나 형상으로 보아 최근의 것은 아니다. 큰 단일 건축물이거나 가건물이라면 여러 채가 있었을 면적이다. 집으로 보기에는 너무 큰 규모라 오래전 마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정도면 말 3백 필 이상은 사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구천동 목장의 실체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야트막한 부채산을 중심으로 옛 구천동목장이 운영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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