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단풍론(丹楓論)
정치와 단풍론(丹楓論)
  • 거제신문
  • 승인 201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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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석 칼럼위원 전 거제문인협회장

▲ 김한석 칼럼위원
전 거제문인협회장
지금 '현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순간이냐! 가령, 이리도 저리도 못하는 절박한 때에 어째서 우리들은 지금을 그냥 끌고 가는 것일까? 작게는 자기 몸에서도 이러한 일에 굴복하고 있거니와 세상의 위압감에서도 대처해야 할 일을 자만하거나 몰라하고 무사 안일한 일상은 아닐까? 이러한 심적 갈등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으로 날아오는 외적 침입에 대해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배타적 모함을 서슴없이 자기 아닌 상대편에 돌리고 있음이 사실이다.

지금 순간이 중요한 만큼 누구나 반성의 여지도 국익과 국민의 입장에서 바로 서야 한다. 북한은 불행하게도 늘 폐쇄적 선군사상으로 일관해 우호적 자유민주주의의 현재성을 포기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글로벌 세계현실에서 중량감을 나타내는 일도 아니다. 우리들은 결코 '핵'의 무분별한 위력에 정감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핵을 만능에 앞세우려면 여기에 아부하거나 소아적 공포심 내지 '속내성' 나약함으로 자기 몸에 비수를 꽂듯 해서는 안될 일이다.

지난 10월 임진각 일원에서 보수단체와 진보단체가 충돌한 통일염원의 풍선날리기는 하늘에서 멀리 북녘을 향한 계시처럼 가슴을, 머리, 그리고 발걸음을 더욱 더 부풀게 할 이유가 있다. 그런데 정치 현실은 여야의 목소리가 다르다. 자유를 위한 순결한 풍선은 차라리 무한 자유의 순명에 의한 파열의 조난이 와도 누가 감히 말릴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 헌법에 의한 자유의 사상에서도 그렇다.

늦가을 단풍은 더욱 열렬한 염원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중요한 가을의 중심을 은혜로 여긴다면 생명과 계절의 뜻을 확연하게 전하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단풍나무들은 곁에 공생하는 특히 소나무의 청정함을 더 빛내준다고 할까, 상대를 생각해주는 보시(報施)도 이만한 빛깔이 없다. 청(靑)과 적(赤)의 영원한 하모니는 공생의 화려한 역할을 다해준다.

현재를 지킨다는 그 무한한 뜻은 거룩한 변화이기도 하다. 단풍이 옷을 갈아입을 때와 청송이 겨울을 지내는 고절은 심각하기도 하다. 명산을 대충 떠올려보면 천하 명산 금강산도 가슴의 늑골마다 만상형용의 바위를 품고 있어, 뿜어내는 가을 단풍의 붉은 빛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소나무의 청정한 자태 역시 오히려 한껏 자세를 낮추고 금강산 명산 영역에서도 가을 단풍을 근원(根源)처럼 함께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리산, 속리산, 내장산, 그리고 한라산 단풍까지 활엽수 일색으로 가을단풍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단풍은 그래서 청송이 곁들인 아름다움이다. 우리들이 많은 것을 자연에서 배우게 되는 것도 가장 신뢰하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현실 역시 보시와 공생의 순일한 모습으로 달라져야 한다.

지금 현재는 단순히 과거나 미래의 역사적 사실의 이음 역할을 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과거의 못다함을 논하고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끊긴 것을 잇는데 필요한 힘을 주며 미래의 긍지를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의 보고가 바로 현재라는 것이다. 국회가 예산을 가까스로 회기중에 통과시킨 것은 그만큼 현재성의 무게를 깨달아서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역경을 바로 세우고 미래를 예측하는 입지의 인물이나 사실을 예로 들기도 하지만은 이러한 일을 모른다고 많은 시간을 방황하기 전에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도 물어봐야 하는 것이 일의 첩경이고 깨달음이다. 달걀 껍질만큼도 못한 장벽을 우리들은 깨트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은 그만큼 내재한 힘과 에워싼 주변의 은혜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미 품에 안겨진 아늑한 힘과 거의 무한대에 치솟는 에너지의 근원은 생각하는, 미음하는 현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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