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도에서 팽목항으로 파견된 소방대원 두 명 가운데 한 명인 김 소방장은 1995년 경남소방구조 특채 1기로 입사해 구조대로 근무해오던 중 심해잠수 훈련교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4월25일 세월호 수색작업에 파견됐다. 한국잠수협회 상급강사·잠수기능사·인명구조사·동력수상레저·인명구조사 등 그가 보유한 자격증만 해도 9가지다.
김 소방장은 사고현장에 급파돼 5월16일까지 보트순찰 및 항공순찰을 통해 실종자 관련 유실품을 수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5월17일부터는 본격적인 실종자 수중 수색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견 당시 현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실종자 가족과 구조대원·자원봉사자들 모두가 슬픔에 잠겨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실종자들을 애타게 찾아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곁에서 지켜봐야했던 대원들도 숨죽이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인원이 구조에 참여하고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구조될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 줄 그땐 미처 몰랐었다."
그는 수색작업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안타까움이었다고 털어놨다.
"기상악화로 구조진행 속도가 늦어질 때 안타까움은 더했다. 그렇다고 급한 마음에 아무 준비없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물살이 잠잠한 정조 때를 기다려 1시간씩 수색작업을 진행했으며 각종 부유물로 시야가 흐려진 수중에서 선체 곳곳을 수색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수색을 마쳐야 한다는 심적부담이 컸다. 2인1조로 투입된 바다에서 버디(함께 잠수한 동료)를 잃을 뻔했던 아찔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줄 하나에 의지해 수심 40미터 속을 헤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큰 공포인지 미처 몰랐다."
수중수색 투입 전 혈압측정과 장비단속을 단단히 한다 해도 언제 어디서 선체가 무너져 내려 갇힐지 모르는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어렵게 수습한 시신은 바닷 속에서 신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DNA검사를 실시하고 일일이 유가족의 DNA와 대조해 일치해야 비로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각종 부유물·흐린 시야로
힘든 작업…매일 통화로
가족에게 안부 전해

김 소방장은 "1차 파견기간 두 달여 동안 집에 가지 못해 매일 가족과 통화하며 안부를 물었고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유족들의 슬픔의 깊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면서 "보고 싶은 가족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고통으로 힘들었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어려운 시간 속에서 김 소방장을 버티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보람이었다. 실종자수가 한 명 한 명 줄어들 때마다 구조의 보람을 느꼈다는 그는 10월28일을 마지막으로 구조하지 못한 9명의 실종자가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팽목항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우리 아들·딸들'이라는 희망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면서 "본부 해체 소식에 오열하던 가족들을 남기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시작이라는 다짐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동료 구조대원들이 있어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었으며 그들의 노고에 같은 대원으로서 자랑스럽다"며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9명의 실종자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이 같은 재난은 더 이상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