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범좌수 이야기
옥범좌수 이야기
  • 거제신문
  • 승인 20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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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으로배우는거제역사21]거제의 구비문학

거제 수월골에 옥범좌수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성은 옥(玉)씨였고, 아는 것이 많고 꾀도 많은 탓에 사람들은 좌수(座首)라고 높여 불렀다. 옥좌수의 눈을 보면 그 눈동자에 범이 보인다 하여 '옥범좌수'가 되었다. 거제 땅에서는 말로나 꾀로 아무도 옥범좌수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옥범좌수는 나라 구경을 해 보겠다고 부산포로 해서 경주에 갔다. 배포가 큰 옥범좌수인지라 경주에서 제일 잘 산다는 최부자집을 찾아 갔다. 그런데 최부자집에서는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임금께서 경주 남산옥돌로 안경을 만들어 바치라고 했는데 잘못하여 안경알 하나를 깨뜨렸다는 것이다. 안경을 바칠 날짜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아 그동안 돌을 아무리 열심히 갈아 만들어도 한 달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임금과 약속을 어기면 벌을 면치 못할 상황이라 최부자는 식음을 전폐할 지경이었다. 옥범좌수는 최부자에게 아무 걱정을 마시라고 하면서 깨진 안경을 주면 자기가 갖다 바치겠다고 하였다. 최부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흘밤낮으로 옥범좌수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여비도 두둑하게 주어 서울로 보냈다.

옥범좌수는 안경을 창호지로 열두 번, 비단으로 열두 번을 싸서 봇짐에 넣고 출발했다. 대구로 가는 길에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탔는데 삯을 내라는 사공과 돈이 없다는 옥범좌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이를 지켜보던 대구 달성 서씨 젊은이들이 배에서 내리자 마자 옥범좌수에게 달려들어 넘어뜨리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가만, 가만, 이거 큰일났다" 하면서 옥범좌수가 봇짐 속에서 비단에 싼 안경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깨진 안경을 보이면서, 이 안경은 임금님께 바칠 안경인데 당신들이 나를 넘어뜨려 깼으니 관가로 가자고 윽박질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달성 서씨 문중어른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을 하면서 모시고 가 융숭하게 대접하고 임금님께 잘 말해 달라며 여비까지 두둑하게 주었다. 그렇게 대접을 받고 서울에 도착해 서울에서 부자로 소문난 윤대감 집에 찾아가서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종이 말렸다. 실랑이가 나 몸싸움까지 벌어지자 옥범좌수는 일부러 넘어졌다.

밖이 소란하자 윤대감이 나와 연고를 물으니 옥범좌수는 종이 나를 넘어뜨려 임금님에게 바칠 안경이 깨졌다고 생떼를 썼다. 윤대감 깨어진 안경을 보고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옥범좌수를 일주일 동안 묵게 하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안경을 바치기로 약조한 날 막무가내로 경복궁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문 앞을 지키던 병졸들이 옥범좌수를 내 팽개쳤다. 옥범좌수는 같은 수법으로 병졸들 때문에 안경이 부러졌다고 보이자, 문지기들은 어쩔 수 없이 임금에게 그것을 보고하였다. 임금이 보니 정말 안경이 깨져 있었다. 문지기의 잘못으로 여긴 임금은 최부자나 옥범좌수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궁을 나온 옥범좌수는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대접을 받으면서 유람하고 돌아왔다. 그 후, 옥범좌수는 논두렁에 물을 대고 누워 자다가 위에서 괭이가 떨어져 맞아 죽었는데 그 때는 눈에 범이 없었다고 한다. 욕심이 많아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려다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죽을 때가 돼서 범이 가버린 것이라고도 사람들은 말했다.

수월에서 양정으로 가다보면 골에 작은 보(洑)가 있는데 이를 옥범좌수보라고 하고 그 골짜기를 옥범좌수골(사진)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리: 윤일광 논설위원
(자료: 거제향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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