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의 동료와 친구들로 어울려서 하던 해맞이를 예년과 달리 금년엔 단출한 가족끼리 하기로 했다. 예보된 우리 동네의 일출시간이 7시34분이라 7시 전에 삽짝을 나선다. 산을 등진 서향마을이라 새벽이 꼬리를 남기고 있다. 산 초입에 이르니 서릿발이 밟힌다.
참으로 오랜만에 밟아본다. 발밑에서 스러지는 감촉과 서걱이는 소리가 정겹다. 숲의 시린 바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갈하게 한다. 작은 숲이지만 스스로가 지닌 생명력과 향기로 사람이 내뱉는 입김을 대신해 신선한 정기를 넉넉히 채워준다. 새해 첫 아침에 얻는 귀한 첫 선물이다.
숲을 지나 능선에 다 올랐는데도 을미년의 아침 해는 기지개만 켜고 있는지 떠오르는 기미가 없다. 새해 얼굴을 내밀 건너편 둔덕의 산방산은 아직도 지난해의 상복(喪服)을 벗지 못한 형국이고 그 밑으로 길게 자리한 견내량도 묵은 비늘을 다 털어내지 못해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먼저와 있던 동리 사람이 인사를 한다. 반갑다. 수년을 한 동리에 살면서 목례만 할 뿐인 사이가 새해 아침이라 이리 좋은 반김을 나누게 된다. 같은 말로 응대하며 해간도와 한산도까지 한눈에 드는 바다를 향해 심호흡을 한다. 산위에서 들이쉬는 하늘과 바다의 청량함이, 섬들의 살뜰함이 새아침의 정기로 단전까지 파고든다. 시원하고 달다.
해마중 자리를 잡고 덕담들을 주고받는 사이 건너편의 산등은 더 짙어지고 산머리는 주황의 실루엣 머플러에 둘러싸인다. 이 실루엣도 잠시, 몇 숨을 주고받는 사이 황금의 띠를 두른다 싶더니 찰나에 을미년의 새아침해가 머리를 내민다.
새해다, 2015년을 밝히는 새해다. 우리가족을 포함한 여섯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신선함과 찬란함이 비친 얼굴로 다시 인사를 나눈다.
오늘의 아침해는 어제의 그 해요 또 그제의 해며 내일의 해일 것이다. 변함없는 천지간의 섭리이다. 이 순환의 섭리에서 우리는 시작과 끝도 읽는다. 시간의 12점이 그렇고 밤과 낮의 하루가, 이들이 모여진 한 달이 또 열두 달이 되고 이로써 한해가 가고 오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보내는 해를 아쉬워하며 한 해의 첫날 아침, 시작과 새로움의 뜻을 담기 위해 해돋이가 좋은 곳을 찾는 것이 아닌가.
돋는 아침의 새해를 보며 마음의 무엇을 다지기보다 개인적인 일상과 세상사를 먼저 되돌아본다. 잘못해서 후회되는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되돌아보니 개인적으로는 감사할 일이 참 많다. 감사할 일이 많다는 건 복 많이 받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세상은 나만 좋아서 다 좋다 할 수 없다 한다. 지난 2014년의 세상사는 슬프고 아팠다. 더러는 이보다 더하다 한다.
전국의 교수회가 해마다 그 한해를 반영하는 사자성어는 이를 잘 말해준다.
2014년을 '지록위마(指鹿爲馬)'라 결론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2014년은 수많은 사슴들이 말로 바뀐 한 해로 온갖 거짓이 진실인양 우리 사회를 강타해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말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중론이다.
그래도 우리는 찬란히 떠오르는 새해를 보며 또 새롭게 소망한다. 전국 교수회가 2015년에 바라는 정본청원(正本淸源),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여 앞으로 나아가자고, 순리도 거스르지 말고, 남을 속이거나 옳고 그름을 바꾸지 말고, 위선과 반목을 걷어내어 다시금 제자리 똑바로 서자고 소망한다.
이로서 소시민의 작은 행복과 감사들이 온전히 누려질 수 있기를 또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