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건 거꾸로 쓰고 논 팔아먹을 놈'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통영 사람들이 거제 사람들을 일컬어 모질다고 욕할 때 에둘러 쓰는 말이지만 그 내면에는 영리한 사람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둔덕면 거림리에 사는 반윤하(潘允河)씨는 천하의 한량이었다. 풍채 또한 좋아 어디를 가도 대접 받았다. 돈 한 푼 없이도 전국을 유람하고 올 정도이니 그 언변이나 지략이 보통사람들보다는 훨씬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4년, 일본 정부가 일본인들에게 저리의 융자를 주어 한국의 농토를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었을 때였다. 통영에 있는 일본 부자들이 한국사람의 논이나 밭을 살 때 제값을 쳐주기는커녕 교묘하게 거의 빼앗다시피 했으니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이를 본 둔덕 반윤하씨는 일본 부자를 골탕 먹일 요량으로 어느 날 새벽 일찍, 아침밥을 먹고 허름한 복장을 하고 거제반씨 족보를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차고 견내량을 건너 통영으로 건너갔다.
통영에서 제일 큰집이었던 세병관에 돈 많은 일본 부자들이 모여 술판을 자주 벌인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세병관 뜰에 가서 망건을 거꾸로 쓰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부자가 기생들을 데리고 술판을 벌이려고 하고 있었다. 반씨가 뜰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까 일본 부자가 "당신, 어떻게 왔소?" 하고 물었다.
"나는 거제 둔덕에 사는 반 아무개인데, 요즘 일본사람이 논을 산다고 해서 논 팔러 왔지요?" 하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논을 팔려면 논문서가 있어야지" 하고 일본 부자가 말하자 반씨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자기를 풀어 논 문서라 하면서 반씨 족보를 내 놓았다.
"이건 족보잖소?"
"아, 그러네요. 새벽 일찍 나오느라 논 문서하고 우리 집 족보하고 헷갈려 잘못 들고 나왔네요" 하고 또 능청을 떨었다. 보통 논 문서는 얇은데 두터운 족보하고 헷갈릴 정도라면 논문서가 상당할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그러나 옷매무새 하고 거꾸로 쓴 망건을 보니 좀 어수룩해 보여 잘만하면 이 사람이 가진 논을 모두 차지할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일본 부자가 "논이 얼마나 있소?"하고 물었다. "논이야 많지만 내가 팔려는 논은 아무리 비가 안 와도 물 걱정이 없는 곳으로 서마지기 논이 한 배미로 된 최고 좋은 땅이지요" 하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렇잖아도 거제도 둔덕들 논이 탐이 났던 일본 부자가 그래도 의심스러웠던지 "그럼, 내일 논 문서를 가지고 오면 내가 사겠소" 하고 말하자 반씨가 "통영 한 번 나오기가 쉬운 일도 아닌데 사기 싫으면 마시오. 내 다른 사람을 알아보리다" 하고 발을 빼자 일본 부자는 마음이 급해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시오. 당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니 지금 계약합시다" 하고 나섰다.
"오늘 당장 논값을 다 주면 계약하고 아니면 마시오" 하자 일본 부자는 이 논을 빌미로 남은 논을 모두 매입할 요량으로 반씨가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지불했다.
며칠 후 일본 부자가 논을 보려고 둔덕 거림리로 갔다. 반씨를 만나 자기가 산 논에 같이 가자고 했다. 반씨가 일본 부자를 데리고 간 곳은 하둔마을의 간척지였다. 바다를 개로 막은 곳인데 그냥 바다나 다름없는 곳에 모가 몇 개 꽂혀 있었지만 바닷물이 들어와 모두 노랗게 변해 있었다.
"이게 뭐요?" 하고 일본 부자가 따졌다. "뭐긴 뭐요. 물 걱정 없는 논이지요. 해수가 들어와서 그렇지 모가 심겨져 있으면 논이지요" 일본 부자는 그제야 속은 줄 알고 통영법원을 통해 논값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걸었지만 반씨는 작정하고 그 돈을 다 마을 일에 쓰고 빈털터리가 되어버려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정리 : 윤일광 논설위원(자료 : 거제향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