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쓰고 소(牛) 잡아먹을 사람
섬 쓰고 소(牛) 잡아먹을 사람
  • 거제신문
  • 승인 20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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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남에게 들키지 않고 교묘하게 처리했을 때 이를 두고 거제사람들은 '섬 쓰고 소 잡아먹을 사람(놈)'이라는 말을 쓴다. '섬'이란 '석'과 같은 말로 나락의 부피단위를 나타내지만 때로는 나락을 담는 가마니를 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1885년 을유년(乙酉年) 대흉년 때 연초면 명동리(明洞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근래 300년 동안 없었던 지독한 가뭄으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하도 먹을 것이 없으니까 시루떡 한쪽과 논 한배미(논의 한 구역)하고 바꿔 먹었다고 해서 '시루떡배미'가 있고, 개 한 마리하고 논하고 바꿨다고 '개배미'라고 부르는 논도 생겼다.

일찍 이 마을에 입주한 김씨 집안은 마을에서 부자로 알려져 있지만 흉년을 당하자 배 굶기는 마찬가지였다. 곡식이 다 떨어지자 마을사람들은 키우던 소나 돼지·개·토끼 등 가축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소를 한 마리 잡아도 마을사람들이 나눠가면 며칠을 견디지 못했다. 문제는 보리가 필 무렵인 '보릿고개'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길만큼 심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시기를 견뎌내야 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거나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김씨 집안에도 식솔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방법은 소를 잡아먹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를 잡았다 하면 온 동네사람들이 달려와 손을 벌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금씩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소 한 마리 잡아봐야 며칠을 못 갈게 뻔했다. 소를 잡기는 잡아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마을사람들 모르게 잡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김씨 집안 어른은 고방(庫房)에 걸려 있는 섬을 생각했다. 섬은 볏짚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냥 두면 쥐가 구멍을 내어 다음 해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락이 담긴 섬은 어쩔 수 없지만 다 쓴 빈 섬은 쥐가 구멍을 뚫지 못하도록 고방의 천정에 거꾸로 매달아 뒀다.

드디어 달이 밝은 어느 날 밤에 직접 소를 잡아서 여덟 각으로 나눠 고방의 빈 섬 여덟 개에 나눠 담아 거꾸로 걸어 놓으니 그 속에 소고기가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소가 없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라고 여기고 다음 날 소를 잃어 버렸다고 소문을 내고, 소를 찾는다고 온 산을 뒤지는 소동을 부렸다. 하도 부산을 떠니까 마을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소를 잡아 고방 섬 안에 넣어뒀다는 사실을 김씨집 식구들조차 까맣게 몰랐다.

며칠 지나고 나서 김씨 집안 어른은 혼자 살짝 고방에 들어가 쇠고기를 조금씩 떼어서 노부모와 어린 자식들에게 굽어 드렸다. 잡은 쇠고기는 추운 겨울철이라 부패할 염려가 없었고 오히려 숙성이 되어 더 맛이 있었다. 그렇게 보릿고개 석 달 동안 노부모와 어린아이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다.

'섬 쓰고 소 잡아먹을 사람(놈)'이란 말은 본래 '섬 안에 쇠고기 넣어두고 먹을 놈'이라는 말이었는데 여러 사람을 회자하다보니 '섬 쓰고 소 잡아먹을 사람(놈)'으로 와전됐다.

이 말이 연초면 명동리 김씨 집안의 이야기로 알려지자 김씨 집안 후손들은 어려울 때 마을 사람들을 구휼하지 않고 혼자서 먹은 것이 부끄럽다 해서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조금도 누를 끼치지 않고 기지를 발휘해 슬기롭게 노부모와 어린 아이를 구한 재해극복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정리 : 윤일광(詩人) / (자료 : 거제향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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