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들어서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를 원한다. 어쩌다가 들른 대중사우나 입구에서 경노할인을 위해 조그만 시비가 붙었을 때 겉으로는 불쾌한 것 같아도 속 마음은 "아!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나?" 하고 흐뭇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 30~40년 만에 우연히 고향 친척노인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 "아이구! 니 누구누구 아니가? 많이 늙었구나! 많이 늙었어!" 하는 놀람의 소리를 들었을 때 나의 현재 실상은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사람의 몸은 나이듬과 늙음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모든 사람, 아니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운명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나이 들면 여자는 거울을 깨트려버려라"고 했던가? 그러나 몸이 늙어가고 얼굴에 주름이 져서 점차 추해지는 이 현상은 결코 거울을 깨트려버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도 사람의 마음은 몸처럼 그렇게 빠르고 쉬이 늙지 않을 수 있다. 일본의 근대 에도시대 처세의 명훈을 모아 놓은 '언지록'에서 사토 잇사이는 "청년에 배우면 장년에 큰일을 도모한다. 장년에 배우면 노년에 쇠하여 지지 않는다. 노년에 배우면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고쳐 생각하고 싶다. 배운다는 것은 좋은 글을 읽고 마음에 새기는 것, 여기에 더해 이렇게 나이 먹어 몸이 온갖 잔병이 몰려올 때 마음의 젊음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은 젊었을 때 읽었던 아름다운 글들을 회상하며 지나간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 몸을 붙여 살고 있는 이 조그만 저수지의 목재로 만든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가 쓴 시 '이니스프리'를 상상할 때도 있고, 내가 살고 있는 허름한 농가에 붙은 손바닥 만한 텃밭을 힘겹게 파면서도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를 떠올릴 때도 있다.
그 책 중간 한 장면에 나오는 관절염과 늙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한 정원사 노인의 독백처럼.
"이것 보시오 나도 땅을 파는 것이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내 다리가 관절염으로 걸릴 때면 그 놈의 종살이를 저주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괭이질을 했으면, 땅을 팠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괭이질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르거든요! 땅을 팔 때는 마음이 더 없이 편하거든요! 하기야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무들을 가꿔 주겠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집과 멀리 떨어져 사는 노인의 외로움을 젊어서 읽은 롱펠로우의 장시 '에반젤린'을 다시 읽어보며 달래고 있다. 그 시 속에 나오는 주요테마인 '사람의 일생은 한 번 헤어지고 난 후 영원히 찾지 못할 님을 찾아 헤매는 방황'이라고 생각하면서.
청춘의 마음을 유지해 주는 이 모든 위안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젊었을 때나 그 후에 읽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저 아름다운 글들, 즉 문학의 향기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 생물체로서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나는 좋은 책을 통해 옛 현인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 마음의 젊음을 유지하는 유일한 비법임을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