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옥씨 1500년사 출판기념회 대성황
의령 옥씨 1500년사 출판기념회 대성황
  • 이승철 그루터기 기자
  • 승인 201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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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문중대표 등 1000여명이 참석해 성황

의령 옥씨 천오백년사 출판기념회가 지난달 27일 고현동 거제수협 3층에서 의령 옥씨 대종회 옥형길 회장과 각 지역 회장, 옥씨 문중 대표와 거제시 기관 단체장 및 문화예술인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8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의령 옥씨 천오백년사 사업은 한국문인으로 활동하는 옥형길 회장이 공직을 정년퇴임 한 뒤 2만8000명의 의령 옥씨에 대한 조상의 얼과 후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시작됐다.

출판기념회에서 옥 회장은 "지난 10여년 간 전국 방방곡곡 옥씨가 사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자료조사를 했고 세번의 교통사고로 위험한 고비도 넘겼다"면서 "그때마다 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도 부상을 당하지 않아 조상이 돌봐준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집필은 7년에 걸쳐 신중하게 진행됐다"며 "종족이 살아온 역사를 바로 찾아 그 근원을 이어 나가며 일족의 행적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에게 알리고 기록문화로 남기기위해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예전에는 서민들에게 성이 없었지만 고려 말 성을 하사받은 한 서민이 있었다. 의령 옥씨는 중국 당나라 때 옥을 가공하는 기능공이었는데 당나라 황제에게 옥으로 된 옥띠를 올렸다.

황제가 처음 보는 귀중한 옥띠를 받고 기뻐하며, 옥띠를 받았다고 해서 옥(玉)씨 성을 하사 했다. 그는 구슬 띠를 올려 성을 하사받았고 해서 옥진서(玉珍瑞)란 이름을 가지게 됐다. 구슬같은 보배란 이름이다. 서(瑞)는 벼슬한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홀(笏)인데 천자가 내린다는 뜻이다.

이런 내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옥(玉)씨가 고려의 왕씨가 망하면서 살기 위해서 왕(王)자에 점을 찍어 옥씨가 됐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의령 옥씨의 시조인 옥진서는 정관 팔학사(貞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644년에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왔다.

팔학사는 8명의 학사인데 한문과 지식을 갖춘 학자로 고구려에 와서 한문과 지식을 가르쳤다. 삼국통일이 되자 신라에서 국학교수로 학문을 가르치며 많은 업적을 남긴 공으로 옥진서가 의춘군(宜春君)의 벼슬을 하사 받아. 의령을 식읍(食邑·먹고사는 땅)으로 해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의령은 원래 신라의 장함현(獐含縣)인데 경덕왕 때 의춘(宜春)으로 함안군에 속했다가 고종(1895)때에 의령군이 되었다. 옛 족보에 의춘 옥씨로 기록되어 있는데 의춘이 의령이다.

의령 옥씨 1500년사 제1편은 종족의 역사인 의령옥씨의 기원과 변천사가 담겨있다. 시조와 본관에 대한 내력과 종족의 번영에 대한 종파와 계보, 조상에 대한 향사, 선대의 묘지와 제당 세거 지역, 의령옥씨 장학사업, 역대 임원명단이 기록돼 있다.

제2편은 옥씨 족보의 역사에 대한 대동보와 서문 계파별 파보에 대한 기록이다. 제3편은 충·효·공·열에 대한 기록으로 선조의 충의와 임진란과 선무원종공신 문무관, 그리고 음직과 증직·수직 벼슬을 한 행장록의 서문과 독립운동가와 유학자 효열편으로 구성돼 있다.

제4편은 조상의 유적과 유물로 삼강문, 정열문과 탑과 비석, 뿌리 깊은 묘지 기타 유적유물 전설 등을 실었다. 제5편은 현대에 살면서 정치경제 기업인, 관직과 문화예술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하고 있는 일족의 근황을 상세하게 기록해 서로 간에 좋은 유대를 갖게했다.

의령 옥씨의 집성촌은 거제다. 거제에는 옥(玉)·윤(尹)·신(辛)씨 3성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의령 옥씨 1500년사는 현시대에 처음 보는 동족의 삶과 문화를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후대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며,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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