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수목원을 다녀와서
천리포 수목원을 다녀와서
  • 정종기 그루터기 기자
  • 승인 2015.08.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제에서 충남 태안군 천리포까지 마냥 천리나 달려와 천리포 수목원에 닿았다.

그동안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실물은 보지 못한 내 상상 속에만 있었던 나무들의 세계, 드디어 그곳에 왔다. 아늑하고 조용한 서해안 바닷가, 흰모래사장을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는 이곳은 초입에서부터 요란하지 않은 치장으로 방문객들을 주눅 들지 않게 정다운 모습으로 맞아준다. 

입구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속에 한여름의 전령사인 듯 만개한 수련·백련·홍련이 황홀한 자태로 물위에 솟아 있다. 뭐라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흰빛·분홍빛 한복을 차려 입고 늘어서 있는 여인네 같이 청초한 모습들이다. 마치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수련'이 화폭을 떠나 실세계로 옮아 온 것 같다.

알맞은 간격으로 늘어 선 소나무 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하얀 '민병갈 기념관' 건물이 나타났다. 이 수목원을 세상에 있게 하고 여기 모든 나무들의 아버지가 되고 마지막에는 이곳의 어느 나무뿌리 밑에 묻혀 나무와 한 몸이 된 민병갈은 원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 피츠턴이란 곳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무렵 참전군인으로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이 나라에 반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고 '칼 페리스 밀러'라는 미국 이름을 버리고 한국인 민병갈이 됐다.

이후 1970년대부터 40여년 간 이 땅의 황량한 바닷가 한 모퉁이 땅에 작은 낙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수목원 규모로는 결코 그렇게 크지 않은 18만여평의 부지위에 세계 각지로부터 무려 1만4379종의 나무들을 모아 심었다. 마치 이 땅의 기후와 토질에서 살 수 있는 모든 나무들을 다 모아 경연장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 중 목련 500여종, 호랑가시나무, 갖가지 무궁화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는 이 수목원을 대표하는 집중 수종들이 됐다. 이것 말고도 이 수목원의 땅위에, 길섶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한그루, 풀 한 포기 한 포기에는 그의 꿈과 희망,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곳에 와서 놀랐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마치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정원사 노인 같이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무들을 돌보아 주겠습니까?" 하고 묻는 그의 말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그가 이 땅을 가꾼 공로로 받았다는 그 많은 훈장, 찬사, 사회적 존경도 그의 진정한 업적에 충분한 보상이 되지 못한다.

이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한 부분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놓고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마치 가을에 추수를 끝낸 논에서 농부가 묶어 놓은 볏단 뒤로 사라지듯" 소리 없이 떠나갔다.

이곳을 다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떠나오면서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나는 이제까지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 왔나? 내가 남기고 갈 것은 무엇인가?" 하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