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농사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깨 한 알이 모종 하나가 되고 그 모종 하나가 커서 한 그루 깨 나무가 되어 결실은 그 한 나무에 수십 개의 깨 꼬투리로 그 한 꼬투리에 촘촘히 들어있는 깨알이 100개 가량 되니 대개 20꼬투리를 달고 있는 한 그루 깨 나무의 결실은 2000배의 깨알이다.
그래서 땅 한 평에 깨 나무 5그루를 세웠을 때 정확히 1만 배의 소득은 농사짓는 최소한의 땅에서 실로 무한대의 혜택을 누리게 됨을 알 수 있다.
땅은 거짓말을 안 한다. 이 말은 또 역으로 사람들이 부실한 영농을 했을 때 응분의 대가(對價) 또한 손실과 상심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농사를 짓는 이에게 어쩌면 이 말이 더 소중한 교훈일는지 모른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잘 안 되는 이유는 자연재해 그리고 환경적 요소 등을 들 수도 있으나 최선의 정성과 노력은 그만큼 상응한 보상이 마련됨을 시인하게 된다. 온 정성을 쏟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작물을 위주로 할 때 첫째는 땅심을 헤아려야 되고 둘째로 적당한 품종의 선택과 적지의 합일은 그만큼 수고를 던다.
셋째로 관리의 체득과 시비(施肥) 병충해 등의 확실한 지식과 무엇보다도 깊은 통찰과 신념이 필요할 것이다. 시대변천에 따른 농업의 국익차원이라든가 사회적 선호 업종으로써는 많은 문제점이 생각되지만 모든 업종에 걸친 성공비법의 근본을 농업은 예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토지(땅)를 다루는 농업으로써는 어차피 감내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이른바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됨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그것은 아무리 소득의 순수한 극치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욕심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꼭 사물의 한계개념을 운운하며 미리 인간과 자연의 위대성 앞에 위축되는 일은 말아야 한다. 깨·고추·콩·양파 등 대개 밭작물의 단위면적 수확량은 깨 66·고추 3937·콩 250·양파 6090·마늘 1163(㎏/10a)로 돼 있으나 이러한 일반적인 수치를 변화 성장시킬 수 있는 노력과 창의와 그리고 농업인으로서 농업에 대한 믿음은 한결 같은 탐구와 의지(意志)라고 할 수 있다.
농업의 시대적 고충은 마지막 수익 소득면에서 유통의 원활, 생산소비의 예측불능, 그밖에 FTA 글로벌 경제 업종의 제약 내지 지역특이성 등이 난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농업인 스스로의 자각과 신뢰와 믿음에 투철한 자연관은 인공(人工)의 정성 어린 가세로 가일층 발전하고 변화되리라고 본다.
농업에서 시사하는 제반 가치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마음과 총화의 공동체적 의식이 아닐까? 농자 만물의 근본이라는 명제는 백의민족 배달겨레의 한민족 한 마음이 곧 무한한 생산소득에 이어지는 길이 되고 통일의 염원 또한 든든한 밑거름이 농업정신이 아닐까?
이번 북한의 도발로 고조된 전시사태 유발을 저지할 수 있었던 고위급 회담(8월25일·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북의 핵은 말과 대화와 마음(정신)의 가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일인독재 전체주의의 존립은 핵의 보유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순화된 언어이며, 대북 방송으로 이어지는 스피커 및 전단지 살포가 북한은 두려웠던 것이다.
농업문화를 정신의 기조로 유추하기도 하는 우리들의 일상은 폭력과 핵을 능가하는 자긍과 자강을 더욱 포용적으로 연마(硏磨)하고 있다고 본다.